특별한 날, 특별한 자리, 특별한 사람들. 황기자는 기분 좋게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주변을 둘러봤다. 열흘 정도 앞둔 황기자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좋은 사람'들이 모였다. 황기자의 고등학교 동기인 경찰과 고교 동문 선배님인 구청 공무원, 선배님이 소개해주겠다며 데려온 지방 세무서의 또 다른 후배까지. 구청 선배님이 엄선한 식당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장어와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주는 술, 소소한 선물들, 그리고 끊이지 않는 대화와 농담, 웃음까지. 황기자는 문득 '세상 못 살진 않았구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이들은 언제 어떻게 처음 모이게 됐는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기억을 못 했지만, 좋을 때고 슬플 때고, 누군가의 인사 발령이 있거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하고 모이는 멤버들이었다. 특히 황기자는 '기자 대 취재원'이라는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아서 이들과의 만남을 좋아했다. 괜히 눈치 보고 취재할 것도 없이 옛날 추억담부터 해서 직장 얘기까지 마음 편하게 건넬 수 있는 상대들이었다. 비록 만날 때마다 황기자가 이렇게 말하긴 하지만 말이다.
"뺏지(국회의원)들 연락할 거 있으면 말해요. 근데 나도 정치부 지겨워서... 사회부나 경제부 가야 하는데"
이들의 요즘 술자리 화두는 '민간인'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 아니면 친구의 선배 등 '영끌'한 지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날도 구청 공무원 선배가 포문을 열었다.
"나 아는 선배 와이프가 스타트업에 스톡 옵션 받고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미쳤다고 그랬거든? 와, 근데 좀 버티더니 진짜 돈을 미치게 벌었더라고"
"저도 얼마 전에 술 취해서 대리기사 때린 새끼를 잡았는데, 후배한테 들어보니까 걔가 뭐 유튜브 어쩌고를 하고, 한 달에 얼마를 번다더라? 10억?"
"선배님들, 저는 어떻겠어요. 세금 때문에 이런저런 내역 쭉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 '현타' 와요. 내가 뭐하러 이 짓거리 하나 싶다니까요"
황기자는 이들의 얘기에 한 마디를 보탰다.
"에이, 그래도 여기 다 공무원이시잖아요. 잘릴 일도 없어, 나이 들면 연금도 나와, 뭐가 걱정이에요"
"야, 기자도 반관(半官)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기자는 조기축구회 가도 공격수만 한다며"
"무슨 소리야. 요즘은 발이 치이는 게 기자인데. 솔직히 공무원이 눈치 볼 일 없고 좋지."
"황기자가 뭘 모르네. 요즘 공무원이 어디 공무원인가. 위에선 쪼고, 아래선 말 안 듣고. 또 민원인 눈치는 얼마나 봐야 하는데"
"맞아요. 어디 가서 말이라도 삐끗 잘못하면 완전히 간다니까요."
술자리 대화는 역시나 부러움에서 본업에 대한 자조적인 내용으로 바뀌었고, 그다음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과 속도를 못에 못 따라가는 본인 조직들에 대한 한탄으로 이어졌다.
"구청은 아직도 한글로 문서 만들어. 글자체나 크기 다르면 난리 나. 구청장이 군인 출신이잖아"
"저희 부장님은 SNS가 뭔지 아예 모르던데요?"
"새벽마다 말도 안 통하는 노숙자 상대하는 기분을 아냐?"
"우리는 아직도 말로만 온라인, 뒤로는 광고비 뜯어 오라고 그런다"
이렇게 챗바퀴처럼 대화는 돌고 돌았다. 한 사람이 말을 끝마칠 때마다, 아니면 누군가 재미있게 농담으로 맞받아치고 웃음이 터질 때마다 건배가 이어졌다. 테이블 위에 술병은 쌓여갔다. 그렇게 조금씩 혀가 꼬이고 불콰하게 취했을 무렵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럽게 일어나 거리로 나왔다. 황기자는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
"한잔 더?"
"에이, 가야지. 선배님은 어떻게 하세요?"
"나 차 가져왔잖아. 구청 들어가서 좀 자다가 대리 불러서 갈게. 조심히들 들어가고, 연락하자고."
"선배님들 반가웠습니다. 저는 택시 불러놔서 타고 가겠습니다."
"어디 근처 순찰차 없나. 들어가라. 나도 갈게"
황기자는 한 잔 더 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하고, 지나는 택시를 서둘러 붙잡아 탔다. 황기자는 가만히 생각할수록 뿌듯했다. 멤버 모두가 다음날 아침 일정을 고려해 귀가하는 건전한 모임이라니. 괜히 기분이 좋고 뭔가 든든해진 황기자는 모임 단톡방에 인사를 남기려다가 문득 떠올렸다.
'술값은 누가 냈지?'
황기자는 장어 식당에서 나올 때를 생각했다. 자신은 경찰 동기와 어깨동무를 하고 웃으며 나왔고, 구청 선배와 세무서 후배는 대리기사와 택시를 부른다고 왁자지껄 떠들고 통화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무도 카운터에서 신용 카드를 내민 기억은 없었다. 황기자는 오래전에 들었던 농담이 떠올랐다.
'경찰과 공무원, 기자가 밥을 먹었다. 밥값은 누가 냈을까'
황기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식당 주인"
※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기관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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