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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장인 모 기자 May 10. 2021

정치부 황 기자의 기사 만들기

조용한 청와대 춘추관 기자실에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황기자는 주변 눈치를 보며 황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액정엔 청와대 1진 김○○라고 떠 있었다. 황기자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자 질문이 들어왔다.


"최고위 워딩 봤어?"

"아, 네"


여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나온 발언에 대해 아느냐는 얘기였다. 

황기자는 사실 몰랐다. 하지만 일단 "네"라고 했다. 기자 생활 7년을 하며 몸에 익힌 방어 본능이었다. 

'몰라도 일단 아는 척하라'


"그러면 기류 파악해서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1진은 황기자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황기자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흘깃 봤다. 1진 자리였다. 1진은 어제 저녁 일간지 꾸미 모임을 간다고 했었다. 1진 몇 명이 모여서 청와대 누군가하고 한 잔 거하게 걸쳤다는 얘기고, 그러면 1진은 집에서 자다가 정치부장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라 자기한테 전화를 걸었을 것이라고 황기자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황기자는 1진이 어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1진이 스스로 얘기하기 전에는 물을 수 없다. 친한 사이라면 안 그렇겠지만, 대부분 언론사 분위기가 그랬다. 취재원 보호라고 포장한 일종의 영업 비밀이다. 그래야 1진도 부장하고 직통하고,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처럼 황기자한테 지시를 할 수 있다.


황기자는 얼른 노트북에서 여당팀이 받아쳐서 올린 회의 워딩을 쭉 읽었다. 여당 최고위원 중 한 사람이 '1주택자 등 서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세제 개편안은 재검토돼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분명 여기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의 반응을 받으라는 얘기였다. 뻔했다. 정치부 기자의 일은, 말싸움을 붙이는 거라는 것을 황기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기자는 가슴이 답답했다. 기류 파악. 말은 쉽다. 시키기도 쉽다. 그런데 눈에도 안 보이는 기류를 어떻게 파악하나.


사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머무는 춘추관은 '외딴 섬'이다. 바깥도 제대로 안 보이는 높은 돌담으로 둘러 쌓인 별채다. 청와대 정문하고  300m 정도는 떨어져 있다. 정문으로 간다고 해도 들여보내주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청와대 출입 기자라고 하면, 마음대로 청와대 이곳저곳을 누비며 높은 사람도 만나고 온갖 정보를 얻어 춘추관에 앉아 치열하게 기사를 쓴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황기자는 "대통령은 가끔 보냐"고 묻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춘추관 말고는 갈 수 있는 데도 전혀 없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게 황기자의 현실이었다.


그래도 시킨 일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던 황기자는 핸드폰을 들고 기자실 밖으로 나와 춘추관 앞마당 한 쪽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이미 앞마당 여기저기에서는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얘기하는 다른 기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황기자는 불안해졌다. '저 새끼는 또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황기자는 얼른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대변인, 정무수석실, 누구라도 상관 없었다. 사실 황기자도 대단한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뭐든 한 마디만 들으면 됐다. 문제는 청와대 인간들은 잘 전화도 안 받는 데다가, 아침엔 회의도 많다는 거였다.


황기자는 얼른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기자들은 모두 각자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황기자는 괜히 찔려 입 모양이 안 보이게 등을 돌리고 앉아 엄한 핸드폰만 바라봤다. 전화를 받을법한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성질 급한 1진은 뭔가 지시를 던지면 10분을 채 안 기다렸다. 


드디어 핸드폰이 울렸다. 대변인이었다. 공식 멘트 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나마도 반가웠다. 그래도 전화를 한 건 맞으니까.


"대변인님, 오늘 최고위 워딩 들으셨어요?"

"응? 뭐?"

"부동산 정책 갖고 뭐라고 했잖아요"

"그랬나?"

"그래서 청와대 입장..."

"국회에서 나오는 얘긴데 뭐. 회의 있어서 이따 통화해."


대변인은 별일 아니란 듯 얘기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너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에 황기자도 더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핸드폰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1진이었다. 두 글자만 쓰여 있었다.


'뭐래'


황기자는 고민했다. 대변인 반응 그대로 전했다가는 쌍욕 들을 게 뻔했다. 황기자는 잠시 생각하고선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청와대 관계자 "국회에서 나온 얘기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성 못 느껴"...진의 확인 중'


바로 답이 왔다.


'닷컴용 하나 써서 올려'

'넵'

'빨리'


황기자는 서둘러 기자실로 다시 들어가, 통신사 기사를 몇 개 열어놓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과 의견, '말했다'와 '밝혔다'의 중간을 오가며.


<청와대 "정치권 발언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어">

정부의 부동산 세제 개편안을 비판한 국민당 박XX 최고위원의 발언에 청와대가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복수의 청와대 관계자는 29일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국회 회의에서 나온 발언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중략) 청와대는 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해당 발언이 나온 배경에 대해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략) 정치권에서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청와대와 여당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황기자는 오탈자를 확인하고선 얼른 '전송'을 클릭했다. 1진의 지시가 나온지 30분 만이었다. 직장인 황기자는 뿌듯했다.


※ 위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정권이나 정당 혹은 언론사와는 무관합니다.


#진짜기자이야기 #정치부기자 #멘트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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