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직장인 모 기자 May 13. 2021

정치부 황 기자의 야간 취재

황기자는 초인종을 누르려던 손 끝을 내렸다. 황기자는 손목 시계를 봤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황기자는 초인종을 눌러도 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복도 센서등이 황기자의 움직임을 기다리지 못하고 꺼졌다. 황기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벨소리와 함께 집 안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저, OO일보 황기자라고 합니다"

"네?"


문이 빼꼼 열렸다. 앳돼 보이는 여고생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황기자를 올려다봤다. 황기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했다.


"누구...세요?"

"저, OO일보 황기자라고 합니다. 박 수석님 혹시 계신가요?"


여고생은 인상을 쓰더니 "아빠!"라는 큰 소리와 함께 집에 들어갔다. 이윽고 나온 박수석은 문틈으로 황기자를 보자마자 놀라면서도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박수석은 얼른 집에서 나와 문을 닫고 황기자와 마주섰다.


"황기자? 왠일이에요?"

"저, 핸드폰 연락이 안 돼서요"

"아니, 그렇다고 이 시간에 집으로 찾아오면 어떻게 해. 집은 어떻게 알았어?"

"저,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게, 무슨 일이냐면요"


황기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집까지 찾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시작은 이날 아침이었다. 경쟁사인 △△신문에 난 단독 기사가 문제였다. △△신문의 청와대와 국회 여당 출입 기자가 쓴 기사였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몇 명과 여당 실세 의원 몇 명이 마포 한정식집에 모여 이른바 '개국 공신'들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 공천 물밑 작업을 했다는 기사였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데, 황기자 회사 OO일보 정치부장은 한 마디로 뚜껑이 열렸다. 며칠째 계속 '물만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국장한테 한 소리를 들은 정치부장은 단체 메시지를 띄웠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야간취재 시작. 기존 저녁 약속 외 취재원 집으로 찾아가서 만나고, 대화 내용 아침에 꼼꼼히 보고하도록'


야간 취재는 말 그대로 밤에 취재하라는 뜻이다. 다만, 일종의 벌(罰) 혹은 화풀이의 성격이 있어서 출업처의 주요 인사의 집이나 집 근처로 밤에 찾아가서 어떻게든 만나라는 지시였다. 황기자는 난감했다. 부장 현역 시절과 달리, 요즘은 집 주소를 알기도 쉽지 않거니와 집에 함부로 찾아갈 수도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시는 지시. 황기자는 재산신고 내역을 뒤지고, 친한 국회 보좌관들에게 매달려 겨우 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황기자는 이런 내용을 아파트 앞 벤치에 나란히 앉은 박수석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이렇게 돼서 불쑥 찾아뵙게 됐습니다"

"황기자 사정은 알겠는데,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고 다음에 약속 잡고 봅시다"


박수석은 황기자의 어깨를 토닥이고 일어나 아파트로 들어갔다. 황기자는 난감했다. 이대로라면 아침에 아무것도 보고할 게 없어 시원하게 욕 먹을 게 뻔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황기자는 벌써 야간 취재를 마치고 한 잔 하고 있다는 선배들이 모인 술집으로 향했다.


황기자는 이미 알딸딸한 모습으로 떠들고 있던 선배들 테이블에 가 앉았다. 목이 탔다. 별다른 인사도 없이 시원한 맥주에 소주를 섞어 일단 한 잔 들이켰다. 그리고 박수석과 있었던 일과 아침이 걱정된다는 얘기를 털어놨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황기자의 얘기를 듣던 한 선배가 훈수를 뒀다.


"박수석, 그 양반 기업 출신이잖아. 그런 양반 집에 막 찾아가고 그러면 어떻게 하냐. 뭐가 될 줄 알았냐?"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겨우 주소라도 파악한 게 그 사람인데"

"짬밥이 안 되니까 야간 취재도 못하는구나"

"저 아침 보고 할 거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내일 진짜 시범 케이스로 왕창 깨질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하던 선배가 말했다.


"아, 이거 내가 이번주에 써먹을라고 그랬는데. 너 K의원 알지?"


K의원은 5선 의원으로 여당 원내대표와 대표까지 지낸 정치 거물이었다. 주요 발언을 거의 대부분 매체에서 다룰만큼 영향력도 컸다. 황기자도 몇 차례 인사를 주고 받은 적이 있었다.


"알죠"

"주소 알려 줄테니까, 내일 아침 6시 정도에 가. 그래서 아침 먹으러 왔다 그래"

"아침이요? 아침밥이요? 그게 돼요?"

"마르지 않는 샘이니까, 나 믿고 한 번 가봐"


선배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화제를 돌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황 기자는 반신반의했지만 선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아침에 힘든 것쯤은 참아야 할 처지였다.


새벽같이 일어난 황기자는 선배가 알려준 K의원의 집으로 갔다. 보안이 잘 된 고급 빌라였다. 황기자는 과감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간밤의 술이 덜 깬 덕분에 용기를 내긴 했지만, 막상 문이 열리면 뭐라고 할 지 고민하고 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이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는 사실이 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일하는 분인 듯한 여성이 웃으며 나와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반갑게 맞아줬기 때문이었다. "왜 왔는지"도 묻지 않았다. 황기자는 의아한 얼굴로 쭈뼛거리며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식탁엔 K의원과 다른 언론사 기자 2명이 앉아 있었다. 황기자는 어색하게 소속을 밝히고 인사를 했다. K의원은 자연스럽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뭘 그리 서 있어. 얼른 와서 한 술 떠"


자리에 앉은 황기자 앞에 밥과 김칫국 한 그릇이 놓였다. 황기자는 조금씩 밥을 먹으며 K의원과 기자들이 하는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들은 날씨부터 간밤의 야구, 그리고 정치권 분위기에 대해서 다양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별한 내용은 단 하나도 없이, 매일 같이 언론에서 다루는 일반적인 주제들이었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같이 밥을 먹던 기자 중 가장 고참으로 보이던 한 명이 "잘 먹었다"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일어섰다. 황기자도 밥이 남았지만 따라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K의원도 자연스럽게 조심히 가서 열심히 일하라는 덕담을 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기서 한 줌 쥐어가"


황기자는 무슨 얘기인지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다른 기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가며 너무나 익숙한 듯 현관에 있던 커다란 항아리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에는 만원짜리가 쥐어져 있었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적당한 양이었다. 황기자 차례가 되자 그들 중 한 명은 항아리를 조금 황기자 쪽에 밀어주는 친절함도 보였다. 


황기자는 유난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아, 태연한 척 항아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조금만 손을 휘휘 저어봐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많은 현금이 들어 있었다. 황기자는 탐욕스럽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없어보이지도 않을 양을 잡아 꺼냈다. 5만원짜리도 껴있어 20만원 정도는 될 것 같았다. 황기자는 현관을 나서며 간밤에 선배가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마르지 않는 샘'


황기자는 청와대로 돌아와 K의원에게 들은 정치권 분위기를 정리해 아침 보고를 마쳤다. 아침이 아니라 밤에 찾아가서 만난 것으로 바꼈을 뿐, 들은 내용은 충실히 보고에 담았다. 그때 포털에는 각 언론이 전하는 K의원의 오전 공식 회의 발언이 주요 뉴스로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언론사와 정당과 무관합니다.


#청와대 #야간취재 #옹달샘

이전 07화 정치부 황 기자의 특별한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