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직장인 모 기자 May 26. 2021

정치부 황 기자의 취재를 위한 취재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직업 중 하나가 '기사 안 쓰는 기자'라는 농반진반의 말을 새삼 느낄 수 있는 황기자의 오후였다. 며칠 만에 배정된 기사가 없어, 황기자는 점심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보좌관 '형님'을 불러내 낮술 한 잔을 하고 기자실에 돌아와 유튜브를 보며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평안한 하루는 흔치 않은 법. 아니나다를까, 황기자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1년에 두어 차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고등학교 동문회 선배인 중소 건설업체 대표였다. 황기자는 받을까 말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인맥'을 생각해 통화 버튼을 누르고 반가운 척 목소리를 높였다.


"선배님, 잘 지내셨습니까. 안 그래도 안부 인사 한 번 드리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네? 제보요?"


제보인즉슨 이랬다. 선배의 회사가 하청을 도맡아 하는 발주처가 있는 있는데, 석 달 가까이 대금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는 상대 회사가 하청업체라는 이유로 본인에게 심각한 갑질을 하고 있다며 억울함과 분노를 뒤섞어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황기자는 눈으로 스포츠 뉴스를 보고 손으로는 마우스를 클릭하면서도 진지한 척 얘기를 들어줬다.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10분 가까이 얘기를 들었다. 전혀 얘기인지 선뜻 파악이 되지는 않았다. 건설업계에 대해 지식이 전혀 없는 데다가, 계약도 복잡하게 얽히고, 재하청업체까지 중간에 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기자는 하지만 절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얘기를 끊었다.


"선배님, 마음 고생 많으셨겠네요. 그러면 제가 건설 담당하는 후배한테 얘기해서 확인하고 기사 쓸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황기자는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기사화된다면 후배에게도 좋고 선배님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모든 기자는 일단은 제보에 반가운 마음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기자에게 돌아온 선배는 결이 달랐다. 


"황기자, 굳이 번거롭게 후배에게 전달할 거는 아니고"

"선배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은 정치부라, 건설쪽 기사 쓸 입장은 안 됩니다"

"아니, 꼭 제보라고 해서 기사를 써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일단 전화라도 한 통 넣어 달라는 거지"


그제서야 황기자는 선배의 진의를 이해했다. 발주처 책임자를 상대로 공사 대금 미지급에 대해 취재를 하되, 기사가 나오면 일이 복잡해 질 수 있으니 그것까지는 선배가 바라지 않고 있었다. 한 마디로 "못 받은 돈 대신 받아달라"는 얘기였다. 


황기자는 "일단 책임자 연락처를 달라"며 긍정적으로 대답을 하고 끊고 선배의 얘기를 되새김질했다. 전혀 기억나는 게 없었다. 선배의 얘기를 귓등으로 흘려버린 탓에, 솽기자는 선배의 회사가 무슨 공사를 언제 어떻게 했고 얼마나 되는 금액을 못 받았는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재하청업체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황기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종의 '관리'가 필요한 선배가 민원을 넣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황기자는 선배에게 받은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OO일보 황기자입니다. 저희 회사로 제보가 들어와서 전화드렸습니다. 하청업체를 상대로 한 갑질하고 공사대금 미지급했다는 의혹이 있더라고요"


황기자의 전화를 받은 담당자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선배의 회사가 작업 재하청을 주면서 불법 계약을 하고 비용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며 전반적인 공사와 계약에 피해를 끼쳤고, 이에 대한 해결책이 없이 발주처가 무책임하게 공사대금을 지급할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황기자는 여전히 눈으로는 스포츠 뉴스를 보고 손으로는 마우스를 클릭하면서도, 상대의 뜻을 명확하게 파악했다.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결론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황기자는 이대로 통화를 끝낼 수 없었다.


"네, 말씀 감사하고요. 일단 반론에 대해서 충분히 잘 들었고요, 저희가 차후 기사 쓸 때 충분히 고려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전화를 끊은 황기자는 '일침'을 가했다는 생각과 함께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확인 사살'이 필요했다. 황기자는 건설 출입 후배에게 물어 해당 업체의 사업 본부장과 홍보 본부장의 연락처를 받아 연달아 전화를 걸어 똑같이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취재의 취지를 잘 설명했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별로 큰 금액이 아니지만,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대금이 안 돌면 생활이 안 되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언론사 입장에서는 약자의 입장에 대해 더 공감가는 면도 있고요. 요즘 갑질이 이슈기도 해서 확인도 필요하고요. 원만한 합의가 없다면 더 그렇고요. 네? 하청업체가 제보한 건 모르겠고요, 저희도 익명으로 들어온 복수의 제보에 대해 확인하는 중이니까요. 그럼 일단 반론권은 충분히 드린 것 같고요, 말씀 감사합니다."


황기자는 전화를 끊고선 다시 스포츠 기사로 눈길을 돌렸다. 떡밥을 던졌으니 기다리는 게 순서였다. 이윽고 전화가 진동했다. 해당 발주처의 홍보 본부장이었다. 황기자는 모른 척 전화를 받았다.


"네? 아, 하청업체하고 대금지급 관련해서 원만한 합의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라고요. 혹시 하청업체와 연락도 해 보셨나요? 아, 해 보셨고, 관련 논의가 있었나보네요. 네, 그럼 참고하겠습니다."


황기자는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선배의 전화가 올 차례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선배님, 압체에 전화해서 확인 요청을 좀 드렸고요. 네? 아,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합의될 것 같으시다고요? 어이구, 다행이네요. 네? 에이, 감사는 무슨요. 언론의 역할이죠. 네, 그럼 지난번에 갔던 횟집, 일식집이었나요? 거기에서 그날 뵙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쇼"


황기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평온안 하루로 돌아왔다. 그때 황기자가 상대했던 발주처의 홍보본부장은 OO일보의 일부 부장과 함께 친분이 있는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나 있을 지 모를 보도에 대한 대비책을 분주히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배 회사에서 돈을 못 받은 재하청업체는 아는 기자도 없는 데다가 지속적인 공사 계약도 필요해 속만 태우고 있었다.


※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업계나 업체, 언론사와 무관합니다.


#취재 #민원



이전 08화 정치부 황 기자의 야간 취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