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시간 째였다. 양기자는 방송사 로고가 크게 박힌 초록색 마이크를 들고 대형마트를 헤맸다. 평일 오후여서 손님도 별로 없었지만, 양기자는 빠른 발걸음으로 구석구석을 몇 바퀴 째 돌았다. 기사에 딱 맞는 시민 멘트를 따야 했다. 양기자를 따라다니던 영상촬영 기자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씩 거리를 뒀다. 양기자는 초조했다. 마감 1시간 전이었다.
사실 양기자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양기자는 <불신에 지쳐 확인…온라인 쇼핑보다 오프라인 쇼핑이 대세>라는 기사 '야마(주제)'에 공감하지 못했다. 21세기하고도 20년이 넘게 지난 시점과 어울리지 않았다. 현실과 맞지도 않았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야마였다. 양기자도 오전에 데스크에게 메시지를 받고선 '얘기 안 된다'고 의견을 얘기하긴 했다. 데스크의 한 마디에 뭉개졌지만 말이다.
'총 맞기 싫으면 단독을 가져오던가, 아니면 기획 발제라도 잘하던가'
벌써 나흘 째 메인 뉴스에 리포트를 내지 못한 양기자는 할 말이 없었다. 최근까지 육아휴직을 다녀온 데다가, 육아를 빌미로 팀 저녁 약속이나 회식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내려받은 리포트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감 떨어졌다'는 평가와 함께 사건팀으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갖고 있었다. 사건팀 발령은 워킹맘이 아닌 전업 주부를 택하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양기자는 오전에 부지런히 움직여 점심도 안 먹고 기사를 올렸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관련 협회에 전화를 돌려 최근 오프라인 쇼핑이 늘고 있다는 통계도 받았다. 물론 오프라인 쇼핑 증가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적어도 온라인 쇼핑에 대한 불신은 큰 이유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통계란 게 원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겠는가. 양기자는 협회 관계자의 적절한 멘트를 받아 기사에 녹였다. 그리고 전통시장까지 가서 장 보러 나온 할머니 멘트까지 힘들게 땄다.
"어머니, 그래도 이렇게 시장에 오시는 게 온라인 쇼핑을 잘 믿지 못해서 인 거, 맞죠?"
"믿고 말고가 아니라, 나는 그런 거 어려워서 못혀"
"어머니, 그러면 '온라인 쇼핑은 어렵기도 하고 직접 보지도 못해서 믿음이 안가서 시장에 나온다', 이렇게 한 마디만 해 주시면 어떨까요?"
"아이, 됐어. 이제껏 그렇게 물어봐 놓고 뭘 또 말을 시켜"
여기까지가 양기자가 받은 최선이었다. 할머니는 짜증을 내며 떠났고, 영상촬영 기자도 다른 일정 때문에 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양기자는 얼른 근처 마트 본사 기자실로 들어와 기사를 써서 보냈다. '어려운 미션이었지만 잘 해냈다'는 뿌듯한 마음과 함께. 하지만 데스크는 차가운 반응을 쏟아냈다. 특히 할머니 멘트가 문제였다.
'어렵다는 얘기 말고 없어?'
'온라인 쇼핑은 실물 확인이 어려워 믿음이 잘 안 간다. 최근에 후회도 많이 했다. 이제 오프라인에서만 산다'
'뭐 이런 멘트가 들어가야지'
'그리고, 고생은 했는데, 전통시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할머니도 안 어울리지 않아?'
'당연하고 쓸모없는 멘트를 뭐하러 따'
'기사 고쳐놨으니까, 이렇게 좀 해'
대답할 틈도 없이 퍼부어진 데스크의 메시지 앞에서 주눅이 든 양기자는 기사 입력창에서 데스크가 수정한 버전을 열었다. 전체적으로는 원래 기사와 비슷했지만, 할머니 멘트 대신 다른 게 들어가 있었다.
[시민 멘트] -> 젊은 사람으로
"최근에 온라인 쇼핑으로 옷하고 신선식품 샀다가 후회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꼭 이렇게 눈으로 제품 보고 사요. 사실 대형마트하고 온라인 쇼핑 가격 차이도 얼마 안 나고요"
양기자는 데스크가 써 놓은 '시민 멘트' 부분을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채워 넣으라는 뜻이었다. 답답함에 중얼거리는 양기자를 보고선 옆자리에 있던 OO일보 후배가 한 마디 거들었다.
"우린 그냥 가명 처리하고 적당이 고쳐 쓰면 되는데, 방송은 참 귀찮은 게 많아"
양기자는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다시 마트 촬영 섭외 전화를 돌려서,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에 온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도 별로 없거니와, 데스크가 써준 내용을 말할 시민은 더욱 없었다.
"양기자,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우리도 다음 일정 가야 해"
영상촬영 기자가 양기자를 보챘다. 양기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나 손님은 없었다. 양기자가 고민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데스크였다.
"멘트 땄어?"
"지금 OO마트에 따러 왔는데요,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어쩌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이제 퇴근시간 되면 사람들 올 테니까"
"그러면 뉴스는 빵꾸나라고? 민원 아이템 하나 때문에?"
"죄송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하냐. 너 진짜 애 낳고 오더니 감 떨어졌구나. 에휴"
데스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기다려" 한 마디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이윽고 양기자의 메신저에 연락처가 하나 떴다. 마트 홍보팀장 연락처였다. 그리고 또다시 뜬 데스크의 메시지.
'빨리 만들어라'
양기자는 머리 한 구석이 번쩍이는 느낌을 받았다. 연락처와 '만들어라'는 메시지, 그리고 데스크가 마지막에 했던 말,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하냐"라는 말이 '감'이란 단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양기자는 얼른 데스크가 보내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저 멘트 하나만 부탁드릴게요. 네, 마트 내려와 있는데 손님이 없네요. 네? 에이, 손님이 별 건가요. 물건 사면 손님이지. 네, 그럼 기다릴게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여성분으로 좀 부탁드려요."
양기자가 전화를 끊고 조금 지나자 팀장이 앳된 여직원을 한 명 데리고 왔다. 명함을 주고받고 보니, 홍보팀 대리였다. 서둘러 인사를 마친 양기자는 대리를 신선식품 코너 쪽으로 데리고 갔다.
"대리님, 조금 옷이 너무 홍보팀스러워서. 재킷 한 번 벗어보시겠어요? 아, 훨씬 편해 보이네. 팀장님 저쪽에 카트 좀 갖다 주시겠어요?"
양기자는 눈에 보이는 제품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팀장이 끌고 온 카트에 담았다. 그리고 대리에게 카트를 가져다주고, 멘트를 읊어줬다.
"자, 카메라 보지 마시고, 저 보고 말씀하시면 되고요. 아시죠?"
"그럼요. 한두 번 해보나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자, 대리는 양기자가 알려준 멘트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얼마 전에 온라인에서 과일하고 고기를 샀는데 너무 상태가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꼭 이렇게 마트에 와서 눈으로 확인하고 사요. 사실 대형마트하고 온라인하고 가격 차이도 크게 안 나거든요. 오히려 더 싸기도 하고"
"오케이. 너무 감사드려요. 제가 지금 마감 때문에, 성함하고 사시는 곳 동까지만 메시지로 보내주시겠어요?"
양기자는 팀장과 대리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기자실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대리의 메시지가 왔다.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고, 아래에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더 싸기도 하다는 멘트는 꼭 넣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양기자는 눈웃음 이모티콘까지 넣어 답장을 보내고 기자실에 돌아와 기사를 고치고 자막을 넣었다. 하지만 양기자가 수정한 기사에 '더 싸기도 하다'는 마지막 멘트는 없었다.
'어디 감히 기사 갖고 이래라 저래라야'
양기자는 잠시 불쾌했지만, 이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속에는 '감을 찾았다'는 안도와 함께 '더 열심히 해서 사건팀에 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들어 있었다.
그때 양기자가 떠난 마트에서는 홍보팀장과 대리가 카트에 쌓였던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있었다. 뉴스 모니터링을 꼭 하고 임원에게 보고하자는 얘기를 나누며.
※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언론사나 기업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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