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직장인 모 기자 Jun 01. 2021

정치부 황 기자의 '취중취재'

"일단 석 잔은 원샷하고 시작해야죠"


이렇게 호기롭게 시작한 술자리가 3시간째 이어졌다. 불판 위에서 바싹 말라버린 소고기를 앞에 두고 황기자와 마주 앉은 이는 검사 출신 초선 의원이었다. 그는 3년 전 불거졌던 판사 출신 야당 의원의 공천 로비 의혹 사건의 담당 검사였다. 황기자가 어렵사리 의원과의 일대일 술자리를 만들어 호기롭게 덤벼든 이유도 의원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해 사건의 전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서초동에서 20여 년간 갈고닦은 '칼잡이'는 만만치 않았다. 황기자의 공격을 여유롭게 맞받아치더니, 특별히 준비해왔다며 양주로 반격했다. 황기자는 이른바 '양폭' 세례를 받을 때마다 '원샷'으로 굳건한 취재 의지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송곳 같다고 (스스로) 여겼던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나 '칼잡이'는 그 날카로움을 피해 갔다.


"그때, 공천심사위원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1억이나 받았대요?"
"누가 1억 받았대?"

"에이, 그때 서초동 기자들 사이에 다 풀(공유) 됐었잖아요."

"그건 풀한 기자들한테 물어봐야지. 난 나이 먹어서 그런가 숫자에 약해. 0이 네댓 개만 붙어서 잘 읽지도 못한다니까? 근데 갈빗살로 1인분 더 시킬까?"

"0이 네댓 개는 넘었나 보네요?"

"다섯 개 해봐야 만원 아니야? 허허허, 황기자도 싱겁긴"

"배달사고였어요?"

"아, 어제 우리 집에 택배가 잘못 왔는데 말이지, 황기자는 여기 이 앱 써봤어? 어떻게 환불하는지 알아?"

 

이렇게 말꼬투리만 잡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을 황기자는 알았다. 슬슬 술자리가 무의미해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속에서 올라온 양주 냄새가 입 밖으로 역행했고, 애써 부릅뜬 눈도 조금씩 무거워졌다. 황기자도, '칼잡이'도 언젠부터인가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고, 술잔 오가는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황기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다가가야 했다.


"말씀 좀 해주세요. 당장 기사 쓸 거도 아니고"

"뭘 말해줘. 난 아는 게 없다니까?"

"그 양반이 대표 따까리 짓거리한 거 잖아요. 맞죠? 그리고 얼마 '인마이포켓'하고 대표랑 같이 입 닦고."

"아이, 참. 왜 그래"

"나중에 쓴다고 해도 의원님 경쟁자 하나 날리는 건데. 다 알고 오셨으면서, 참 너무하시네. 그럼 힌트만, 힌트!"

 "출발부터 잘못하고 있는데 무슨 힌트를 줘"

"뭔데요, 대체, 그러면"


의원은 진하게 양주와 맥주를 한 컵 가득 섞어서 황기자에게 건넸다. 황기자는 또다시 '원샷'으로 강한 의지를 내뿜었다. 의원도 황기자와 동시에 빈 잔을 내려놓고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그게 뭐냐면, 우선 그 양반하고 그 당 대표는 서로 얼굴도 안 보는 사이야. 사이가 진짜 안 좋아"

"같은 계파잖아요"

"기자들이 그게 문제야. 무슨 출신이니, 같이 토론회를 했니 안 했니.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니까?"

"그럼요?"

"계파는 비슷한데, 그 안에서도 경쟁을 엄청 한다고. 그리고 예전에 그 당 대표 처남이 뭐 때문에 하나 걸린 적이 있었거든. 그거 실형 때린 게 그 양반이고. 찾아보면 나와, 찾아봐"

"아, 그래요?"

"서로 그렇게 가까우면 수사받게 내버려두었겠어? 같이 죽는데?"


'칼잡이' 의원은 설명을 이었다. 공천 로비받은 판사 출신 의원은 세간의 의혹과 달리 당대표 반대 진영의 다른 실세와 가까웠고, 수사 직후 일부러 당 대표를 흘렸다는 것이었다. 돈을 받은 건 맞지만 대부분 반대 진영 쪽으로 흘러들어 갔고, 공천 심사에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애매한 면이 있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황기자는 의원의 얘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물을 연거푸 마시며 눈을 부릅떴다. 의원은 그런 황기자가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더 복잡한 설명을 이었다. 기자들이 아는 것과 다른 그 당의 계파와 구성원들, 돈을 받을 당시의 당 조직, 돈을 받으면서 차용증을 어떻게 써서 어떻게 갚는 척을 했는지 등을 줄줄이 얘기했다. 의원도 술에 취한 터라 조금씩 혀가 꼬이고, 말이 바뀌고, 했던 말을 또 하곤 했지만, 그 안에서도 디테일한 설명들이 살아있었다.


"이제 그림이 좀 그려지지?"

"아, 제대로네요. 근데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말씀이 너무 재미있어서 참다 보니까 싸겠네요"


황기자는 서둘러 화장실로 가 변기 칸에 들어갔다. 그리고선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창을 이용해서 들은 내용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술자리 초반에 켜놨던 녹음은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중간에 끌 수밖에 없었다. 황기자는 한 마디라도 더 기억하고 메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많은 건 아니었다. 의원 혼자 두고 았는데 길게 자리를 비웠다가는 '선수'답지 못해 보일 게 분명했다. 황기자는 흐트러지는 정신줄을 꼭 부여잡고 빠르게 엄지손가락 두 개를 움직여 어느 정도 두툼한 메모를 스스로에게 보내 놓고선 술자리로 돌아왔다. 종업원이 술자리를 정리하고 있었고, 의원 얼굴도 아까와 다르게 조금은 술이 깬 듯 보였다.


"왔어? 이만 일어나지. 너무 취했다"

"아, 한잔 더 하시죠. 이 근처에 괜찮은 카페도 있고"

"이 사람아, 카페는 서초동에서 끊었지. 여의도까지 와서 그러면 욕먹어. 오늘은 이만 가고, 다음에 또 보자고"


의원은 황기자를 토닥이며 일어섰다. 황기자도 덩달아 일어나, 두 사람은 누가 누구를 부축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를 붙잡아가며 비틀비틀 식당 밖으로 나왔다. 의원이 미리 불렀던 듯, 의원은 준비된 차를 타고 떠났다. 황기자는 차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얼른 골목 구석에서 게워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쌓인 알코올이 고기 찌꺼기와 함께 쏟아졌다. 황기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일 죽을 거 같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코가 맵고 속이 쓰렸지만, 참을만했다. 그리고 궁금했던 사건의 큰 방향과 디테일한 취재했다는 뿌듯한 마음이 가득했다. 황기자는 그렇게 비틀거리며 오는 택시를 잡아 타고 필름이 끊겼다. 


황기자는 다음날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들어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황기자는 머리를 감싸고 지난밤에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떠올렸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의원의 주절대는 목소리와 이를 경청하는 본인의 모습만 오버랩됐다. 황기자는 끙끙 신음 소리까지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고 화장실에서 뭔가를 메모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황기자는 서둘러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혼자 주고받은 메시지를 가슴 졸이며 읽었다.


'ㄱㅇ천 반ㄷ ㅔ 꼬지 사이 빌레 ㅊㅏ요ㅇ증 배달ㅅㄱX tn수가 못 박아 골치...'


황기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른세수 밖에 할 게 없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는 것 같았다. 황기자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정당이나 사건과 무관합니다.


#취중취재 #헛소리 #진실은 어디에?

 


이전 09화 정치부 황 기자의 취재를 위한 취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