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지기 쉬운 모범생

왜 자꾸 작은 실수에도 무너져 내리는지

by 댜니

출근한 지 2주 차. 일잘러가 되기보다는 적응하는 데에 더 힘을 쏟아야 하는 요즘이다. 일에도 서툴고 관계에도 서툰 성정은 얄밉게도 어디 안 가서 연일 실수만 가득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누군들 아니겠냐마는 실수 하는 시기의 부담감은 일 자체에서 도망가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너무 거대하게 다가와서 압도되어 버릴 정도로.


한글날 연휴를 30분 앞둔 금요일 오후 5시 30분에 대표님의 지시로 매장에서 판매할 음료수 두 종류를 각각 한 박스씩 구매했다. 오는 손님의 수를 봤을 때 두 박스도 넘쳐나보였지만 '식품을 들이는 건 우리 매장에 아직 시기상조 아닐까요?'라며 입씨름을 하기보다 코 앞의 연휴를 조금이라도 빨리, 편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후다닥. 대부분의 실수는 여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후다닥. 그 와중에 수량도 체크하고 금액도 체크하고 택배비도 체크하고 후다닥 구매결정을 누른 다음 안녕히계세요,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정말 후다닥 빠져나왔다.


파리가 날리기 직전인 매장에 음료수 두 박스는 무리라는 생각이 뒤늦게 든 대표님이 결제 취소를 요청했을 때는 토요일이었고 나는 거지존에 다다른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간 상황이었다. 아, 귀찮게... 그러게 왜 이걸 이만큼이나 산다해서... '네 알겠습니다' 뒤에 이만큼의 말을 담고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음료수는 이미 배송 준비 중이었고 그대로 창을 닫으려는데 아니 이게 뭐람? 왜 모든 사고는 내가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발견이 되는 건지. 어찌된 일인지 후다닥하면서도 체크한다고 했던 수량이 1개가 아니라 2개인 게 아닌가. 2박스도 감당할 수 없는데 3박스라니. 와, 망했다. 결제 취소 어디있어!!


좁은 매장에 36개 들입 박스 세 개가 들여져 있고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대표님과 "수량 체크는 했어야죠..." 말 얹는 과장님과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 그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는 이런 것들 뿐이었다. 6시 퇴근 시간을 30분밖에 남겨두지 않은 시간에(그것도 연휴 전 금요일인데!) 이미 배송 준비를 시작한 사이트의 빠른 일처리에 분통을 터뜨리며 나는 이 연휴를 어떻게 보내야하나 주변 사람들에게 카톡을 날리기 시작했다.



"와 미친 나 사고침"


KakaoTalk_20211021_144134048.jpg 심지어 그 날 실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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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말고 있는 와중에 심장이 쿵쿵 뛰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느껴졌다. 그런 신체반응과 달리 주변인들의 평온한 반응을 보아라. 난 이렇게 죽을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다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반응할까?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내가 과한 반응인지, 저들이 내 친구기 때문에 날 안심시켜주려는 의도인지.


상담선생님께 배운 심호흡 습하습하 몇 번 하고 머리를 차분하게 식힌 다음 생각해보았다.

자의적 판단으로 내린 결정인가? NO (그렇다면 남탓이 가능하다.)

손해가 큰 실수인가? NO (그래봤자 5만원 더 나간 것 뿐이다.)

수습이 가능한가? Maybe YES (연휴 끝나고 고객센터에 물어보면 된다.)


아, 별 거 아닌 실수구나. 객관적으로는. 마음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고 사실은 연휴 내내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해 심장이 답답했지만 머리로는 몇 번이나 되뇌였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결과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었다. 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잽싸게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결제 취소를 원한다고 하니 네~ 한 글자로 모든 상황이 종결되었다. 지금까지 걱정과 불안을 느꼈던 시간이 황당해질 정도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실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왜 자꾸 작은 실수에도 무너져내리는지. 내가 하는 실수들은 언제나 금방 해결이 되었고 피해라고 해봤자 고작 몇 만원에 그쳤고 그것에 대해 나에게 두 번, 세 번 곱씹을 언질을 한 사람도 없었다. 완벽주의적 성향과 더불어 이를 설명할 아주 좋은 개념이 하나 있다. '깨지기 쉬운 모범생'. 닥터와 닥터 사이에서 나온 사랑스러운 레서의 육아일기를 보고 내가 바로 그 깨지기 쉬운 모범생임을 깨달았다.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732955&no=222&weekday=wed


너무 늦은 나이에 좌절을 겪고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 아이는 자라며 다양한 부분에서 무지의 봉우리(숙련도는 낮고 자신감은 높은 상태)를 지나 절망의 골짜기(숙련도가 어느 정도 상승했으나 자신감이 낮은 상태)를 거치고 깨달음의 오르막(숙련도와 자신감이 상승하는 상태)과 지속가능의 고원(숙련도와 자신감 모두 높은 상태)에 다다른다고 한다. 이 중 절망의 골짜기를 처음 겪는 시기가 늦고 회복이 더디면 실패에 특히 취약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병원 상담 중 중학교 때까지 공부에 노력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성적이 잘 나왔다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공부 머리가 좋았다기보다 환경이 조금만 공부를 해도 성적이 잘 나올 수밖에 없는 학군이었고 그 사실이 나에게 이점으로 다가왔지만 벗어나고 싶은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자율형사립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시작부터 처참한 성적을 받았다. 그 때의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쪽을 선택했다. 성적 때문에 학교를 다시 동네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고 넘어가지 못해 지금까지 나는 스스로 '머리가 좋지 않은 애' 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선생님은 그 때의 실패 경험이 생각보다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그 말이 내가 깨지기 쉬운 모범생이라는 사실과 일치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깨지기 쉬운 모범생이며 자주 불안에 떠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깨지는 일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의 멘탈은 유리라서 한 번 깨지면 상처가 나기 십상이지만 유리는 유리 나름대로의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유리가 깨지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자잘한 실수가 사건사고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막연하게 불안해 하는 대부분의 상황들은 대부분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음료수 사건이 전화 한 통으로 말끔하게 해결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대처할 역량과 힘,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게 보통이다. 곰곰히 돌이켜보자. 실수로 인생이 ㅈ된 적이 있는가. 있다면 아마 이 글을 쓰고 있을 수도, 읽고 있을 수도 없겠지 않는가. 그 정도의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사건사고로 분류됨이 옳다. 우리는 수만가지 실수 속에 살고 있고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실수들에 불안해 하지만 아마 실수가 생기면 우리는 잔뜩 불안해 하면서도 겉으로는 의연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자. 우리는 모범생이다. 무엇이든 배워야할 것이라면 착하게 학습하는 모범생인 우리는 분명 그런 역량 또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배워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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