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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Aug 02. 2016

신을 찾으러

나희덕 시인


 신을 찾으러  /나희덕  



검은 부츠를 그곳에 두고 왔다


뒤늦게 신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너무 오래 신어서 이젠 없어도 된다고 대답했다


낡은 벽장 제일 아래 칸,

신은 지금도 어둠에 갇혀 있을까


신이 나를 부르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조용히 빛나는 눈과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합창 소리,

백합 한 송이를 쬐며 온화하게 웃는 사람들


신을 벗어야 신을 만날 수 있는

불꽃나무의 영토를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아일린은 말했지

신의 나라는 멀리 있지 않다고

지상의 하루하루, 피흘리는 싸움 속에 있다고


데이비드는 바울에 대해 말했지

다마스커스의 빛에 눈멀어 말에서 떨어진 사람

신의 신으로 십 년 넘게 떠돌았던 사랍

질그릇으로 빚어진,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때로는 질그릇에서 엎질러진 물 같은 사람

그래서 더 이상 젖지 않게 된 사람


그곳의 하늘에는 북극광이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 본 빛이었다


빛은 어디서 오는가,

빛은 도둑처럼 찾아온다고 했지만

삶은 검은 부츠처럼 낡아가고

꿈에서나 중얼거린다

그곳에 가야 하는데 신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중




  나는 그래


  나에게도 처음 본 빛이 있다.

  잘난 척을 하려는 게 아니라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안도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당신에게도 분명 그 경험이 나와 같이 단 한 번만 다가온 것은 아니지 않나고 되묻는 것이다.
  뭐랄까. 이걸 위로라 표현해야 되나 아님 그냥 담담한 척이라 해야 하나...

  가만 보니 어김없이 신을 찾으러 방황하고 고민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 행위가 나를 어떻게든 움직이게 한다는 걸, 즉 삶을 살게 하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역시 처음 본 빛을 나중에서야 저번에도 본 빛이라고 깨닫는 걸 반복하는 것은 매번 두 눈을 질끈 감게 한다.

  꿈에서나 중얼거리는 내가, 기어코 검은 부츠를 찾으러가려는 내가 마냥 우울하지 않은 이유는 적어도 신을 꼭 찾아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멈칫거릴 줄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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