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란 Aug 16. 2016

분명 이 근처에

유병록 시인


  분명 이 근처에 /유병록



 계단이 사라졌다

 놀라지 않는다 계단이란 종종 사라지곤 하니까


 곧

 계단 위의 집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태연한 이곳에서

 내가 산 적이 있긴 한 걸까


 다른 곳에서

 집이 나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유리창 밖으로 부풀어오르던 불빛도, 옥상에서 펄럭이던 세월도, 시간을 붙잡아둔 몇개의 액자도 모두 사라졌는데


 눈이란 믿을 게 못되지


 분명

 이 근처에 계단이 놓여 있을 거야 저 높이에 창문이 매달려 있을 거야 그 위에 붉은 지붕이 있을 거야


 희망은 순식간에 한채의 집을 짓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밥을 짓고 여기가 몇번째 집인지 묻지 않고


 잠든다

 얼마 전까지 황무지였고 잠시 집이었으며

 다시 허허벌판이 될 이곳에서




(주) 창비

창비시선 371

유병록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중


나는 그래

 그가 맞다. 희망 앞에선 두 눈은 믿을 게 못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하니까. 
 앞날이 막막하고 막연해도 꿈은 잃지 말라는 흔하디 흔한 격언처럼 마음의 눈만은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그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더라도 부러지진 않기 위해서.

 그러나 마음의 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순 없다.
 희망이 단순히 창조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고 믿음은 절실하게 동반되어야 한다.
 이번에 와르르 무너지더라도 다음에 다시 지을 수 있다는 의지를 갖도록, 끊임없이 집을 짓고 허무는 자신의 행동에 의연해져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지쳐 포기할 때까지 계속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힘 빠지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생뚱맞지만, 특히 오늘은 조급해하는 나를 위해, 
 계속 집을 짓고 있는 다른 이들이 익숙하게 되뇌는 "분명 이 근처에 집을 지었던 것 같아."란 말이 그저 부럽게만 느껴지는 나를 위해.

 최근에 개봉한 영화 <워크래프트:전쟁의 시작> 속  카드가가 메디브에 잠식한 어둠의 마법을 몰아낼 때 외친 말을 언급하면서 마무해야지.

" 빛에서 어둠이 오고, 어둠에서 빛이 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을 찾으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