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란 Dec 10. 2018

단지 '나'를 바라봐주는 것

<그랑주떼>, 김상규, 

<그랑주떼> Grand jete / 김상규 / 2018 / 드라마 / 한국 /18분 



   단지 ‘나’를 바라봐주는 것  



출처: <그랑주떼> 스틸컷


현 사회를 꿈꿀 수 있는 사회라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꿈이 뭐예요?” 보다 “꿈은 있니?”라고 물어보는 게 더 익숙한 현실이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새로운 것에 흥미와 짜증을 동시에 느낀다. 

스스로에게까지도 무례하게 “이제 와서 다른 걸 할 시간이 어디 있어.”라 읊조리면서. 그러나 전부 착각이다. 새로운 것에 눈 돌릴 틈이 없어서가 아니다. 꿈꾸는 일이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행위’라서가 아니다. 

제각각의 이유로 지금 하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현재 열심히 ‘꿈꾸고 있는 자신을 몰라주고 있을 뿐’이다. 


<그랑주떼>는 숨죽인 그들에게 당당하게 다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위로를 담아 ‘현실에서도 충분히 꿈을 이루며 사는 나, 자신’을 발견해주고자 한다. 


다희는 얼마 남지 않은 공연을 준비 중이다. 솔로 공연을 해야 하는 부담감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친구 재연이는 다희의 단독공연을 꿰뚫고 있다. 다희는 솔로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일매일 연습실을 찾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어두운 연습실의 조명이 이를 반증한다. 


사실 <그랑주떼>의 스토리는 상투적이다. 좌절감에 주저앉은 주인공이 다시 스스로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전부다. 뚜렷한 악인이 등장하지도 않고,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희의 ‘턴’은 관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많은 이에게 ‘공감’되기 때문이다.

 
출처: <그랑주떼> 스틸컷


관객을 집중시키는 일은 오롯이 다희의 몫이다. 그녀는 사건을 주체적으로 끝까지, 담담하게 이끌어간다. 

다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경쟁자(재연)나 평가자(감독)와 같은 타인의 존재가 아니라,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계속해서 실수하는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꿋꿋하게 버텨내는 그녀의 이야기는 매끄럽게 우리에게 자서전처럼 다가온다.


공연을 앞두고 다희가 연습실에서 본 존재는 후회의 잔상이 아닌, 자신에게 주는 기회이자 선택지다.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자신을 보고 낯설어하면서도, 발레만으로 행복해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랑주떼>는 그 기억을 다희가 무대로 향하는 길목에 환상적으로 풀어놓는다. 이 역시 익숙한 방식이지만, 꼭 필요한 장면으로 그녀와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누구보다도 빛날 미래의 나를 선택한 다희는 무대 뒤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토슈즈 끈을 한 번 더 꽉 묶는다. 


‘그랑주떼’는 가볍게 뛰어올라 두 발을 공중에서 곧게 뻗는 발레 동작 중 하나다. 순간적으로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여 객석에서 보면 아름답고 우아한 동작이지만, 그만큼 단번에 성공하기 어려운 동작이다. 그러나 <그랑주떼>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만 하면 된다. 잠깐 숨을 돌리는 거라 생각해도 괜찮다. 



요점은 넘어지는 내가 아닌 다시 일어나는 나를 알아봐 주는 게 중요하다. 



출처: <그랑주떼> 스틸컷



끈기와 노력보다, 먼저 자신의 빛과 어둠을 모두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많은 이가 여건이 안 돼서, 현실적이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을 챙기지 못하고 있다.   


다희의 ‘그랑주떼’를 못 봐도 괜찮다. 마지막에 자신을 비춘 환한 빛줄기에 힘입어 그녀는 분명 아름답게 날아올랐을 테니까. 





글_‘씨네몽’, 김진실






PS. 본 비평문은 제1회 전주단편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 실린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점 없는 <청춘사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