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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Dec 11. 2018

아웃

<스트라이크>_김민재 

<스트라이크>-김민재 /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의 첫 장면은 독특하다. 맑은 하늘을 가린 엄청난 수의 전깃줄은 잔뜩 엉켜버린 용주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대변한다. 거미줄에 걸려 탈출할 수 없는 그를 구출하는 것은 작은 돌멩이다. 

하지만 ‘용주 구출 사건’은 절망하는 주인공에게 꽈배기 과자를 먹여주는 동네 형의 어색함 만큼이나 매끄럽지 못하다. 용주와 동네 형들의 무반주 댄스는 나쁜 놈의 등장으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관객의 눈엔 지갑을 훔쳐 도망가는 나쁜 놈을 스트라이크로 잡은 용주가 아닌, 뽀송뽀송한 뺨을 헐떡이며 닦는 용주만이 존재할 뿐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용주의 뿌듯한 표정은 관객을 당황스럽게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엔 감독의 ‘주제의식’이 빠져있다. 


개성적인 인물들은 감독의 알 수 없는 의도에 의해 말살당한 채 어설픈 뜀박질을 하고 있다. <스트라이크>의 시선 역시 소극적이다. 극히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배우들의 역동적인 몸짓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해있다.


결과적으로 야구에 소질이 없어 그만두겠다는 용주를 향한 동네 형들의 위로는 요란하나, 사실상 침묵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용주의 ‘자신감 찾기 프로젝트’는 유명무실하다.


충분히 실험적인 내러티브를 전개할 수 있었음에도, 철학적인 첫 장면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보통’ 청년의 고민을 일차원적으로 담아낸 점이 아쉽다. 그리하여 나쁜 놈의 ‘쓰리 스트라이크!’는 결국 삼진으로 <스트라이크>의 발등을 찍는다. 알 수 없는 용주와 동네 형들의 춤사위로 원아웃, 눈치 없이 튀어나온 동네 형의 지갑에서 투아웃, 설득력이 없는 용주의 뿌듯한 표정에서 쓰리아웃이다.


<스트라이크>의 삼진을 오심이라 제기하려면, 감독만의 밀도 있는 시선이 영화 내내 힘 있게 존재해야 한다. 동네 형의 “할 수 있다!”와는 반드시 깊이와 결이 달라야 한다. 빛이 가득한 현재를 삼켜버린 정글을 발견한 감독이라면, 언제든지 <스트라이크>의 스트라이크 아웃은 오심일 수 있으니.

     

출처: <스트라이크> 스틸컷




_‘씨네몽’, 김진실


PS. 본 비평문은 제1회 전주단편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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