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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Jan 11. 2019

잔뜩 걸친 나와 나체인 나의 끝나지 않을 싸움

<우아한 나체들>  A Decent Woman, Los decentes

  <우아한 나체들>  A Decent Woman, Los decentes

  감독 : 루카스 발렌타 리너 / 드라마 / 아르헨티나, 한국, 오스트리아  / 100분 / 2016 / 청소년 관람불가




  잔뜩 걸친 나와 나체인 나의 끝나지 않을 싸움



 

1. 줄거리 요약

주인공 벨렌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부촌 속 한 호화로운 집의 가정부로 들어간다저택을 청소하며 하루하루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그녀는 우연히 부촌 옆에 다른 마을이 있음을 알게 된다호기심에 그곳을 찾아가지만대문을 통과하자마자 나타난 나체족에 놀라 도망치고 만다그날 이후 벨렌은 장벽 너머의 나체주의자 클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비밀스런 그들의 생활이 궁금했던 그녀는 용기 내 나체족 클럽에 들어간다그곳에서 다양하고도 충격적인 일들을 접하게 되지만벨렌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전보다 더 평화로워진다.  

하지만부자 마을과 나체족 클럽은 오래전부터 소음 문제를 비롯한 각종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끊임없이 계속된 두 집단의 신경전은 결국 부잣집 사람들이 나체족을 경멸하며 설치한 전기 장벽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향하게 된다

과연 벨렌은 두 공간 안에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2. <우아한 나체들> 속 벨렌의 위치

2-1. 부자 마을 속 가정부, ‘나’를 잃어버린 인간 


벨렌은 대저택에서 일하는 ‘전문직’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다용도실 옆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사는 가정부(노동자)일 뿐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사적인 공간은 그 작은 방이 전부다. 벨렌은 부촌에 들어간 첫날부터 부자들의 생활방식을 익히며 열심히 일한다. 넓은 집을 구석구석 청소하는 것은 기본이고, 바닥마다 다른 제품을 사용해 걸레질하고, 식기류는 색깔과 종류별로 분류하는 등, 모든 집안일을 주인집 부인의 요구대로 정확하고 깔끔하게 이행한다. 

하지만 가정부 일은 그녀에게 자부심이나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들을 돌보던 일로 힘들어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저 일하는 환경이 더 깨끗하고 넓어졌을 뿐이다. 겉만 화려한 그들의 세계에서 벨렌이 보고 듣는 것은 모두 비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인 것들이다.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는 부자들의 삶은 직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벨렌의 위태로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다. 베이킹 수업을 듣고,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하는 등 나름대로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벨렌은 자기 안에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원인을 궁금해 하지도 않고, 해결책을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다. 


출처: <우아한 나체들> 스틸컷1, 2

(스틸컷1) 속 벨렌의 무표정과 (스틸컷2) 속 상체가 앞으로 쏠린 채 마치 무언가를 들이받을 것처럼 걷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우아한 나체들>이 그녀의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는데 빈번하게 사용하는 비언어적 기호다.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 벨렌의 소리 없는 절규를 담아낸다.

주인공의 삶 속에는 타인(부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무기력한 몸뚱이만 존재한다. 정작 ‘나’의 주체가 사라져버려 삶의 목표나 의지를 잃어버린 그녀다. 손을 움직이는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마당을 청소하는 나의 의지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그런 혼란스러운 하루가 반복될수록 벨렌은 숲속에 숨겨진 나체족 클럽에 마음을 빼앗긴다. 망측스럽지만, 그곳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그녀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한다.



2-2. 나체족 속 벨렌, ‘자신의 옷을 입은 인간’ 


영화 속 '나체'는 일상적인 "안녕"을 의미한다. 벨렌이 나체족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바로 자신에게는 없는 ‘독자적인 자유로움’이 그들에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는 어떤 일을 타인의 간섭 없이 할 수 있는, 단순히 행위의 원동력을 뜻하지 않는다. 타인의 앞에서 나체로 서있을 수 있는 용기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나체족은 각자의 삶의 주체가 모두 자기 자신이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남’을 겉모습과 상관없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옷장이 필요 없다. 굳이 스스로를 감출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벨렌에게 옷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그 옷장엔 겨우 한 벌의 옷만 걸려있을 뿐이다. 부인의 요구로 입는 ‘가정부용 앞치마’가 그녀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유일한 의복이다. 앞치마의 폭력성은 벨렌의 사회적 위치를 규정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상생활까지도 침범한다. 사적인 시간을 보낼 때도 그녀는 언제나 앞치마를 한 사람처럼 전혀 웃질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출처: <우아한 나체들> 스틸컷 3


이에 벨렌은 가방을 싸고 저택에서 나와 나체족 대문을 두드린다. 그들의 품속에 들어가기 위해 온몸을 조르던 자신의 유일한 옷을 벗어던진다. <우아한 나체들>의 사건은 그녀가 나체족에게 정식으로 환영받는 장면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벨렌은 나체 집단 속에 들어가 진정한 '나'를 찾기 시작한다.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금기를 지켜야만 했던 그녀는 직접 금기를 깨고자 한다. 그 욕망은 나체족의 언어와 기묘한 행위를 통해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이후 벨렌은 부인이 아끼는 컵을 일부러 깨기도 하고, 집안의 비싼 도자기를 몰래 갖다 버리는 등…, 갑자기 일을 하다가도 그들에게 뛰어가는 역동적인 행동까지 하게 된다. 꼭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처럼, 그녀는 나체 집단에 매료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벨렌의 이중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3. 나체족과 부자들의 간극

3-1. 부자들의 일방적인 소통 방식 


벨렌이 일하는 집에서 사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위태롭다. 아들은 엄마의 수다를 경멸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조롱하는 엄마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다. 화가 나면, 엄마의 얼굴에 물을 뿌리는 반인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테니스 선수인 아들의 삶 속에서 엄마의 존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두 모자의 삶 속에 벨렌이 하는 일은 단순한 가정부 일이 아니다. 상처받은 부인을 위로해야하는 몫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이 아닌 벨렌에게 있다. 부인은 시시때때로 잠에 빠진 벨렌을 깨워 자신의 옆에 앉힌 후 아들의 어릴 적 비디오를 보며 잠에 든다. 왜 벨렌이 부인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있어줘야 할까. 부인의 절망감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이는 없음에도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다.                                         

부자들의 소통은 일방적이다. 외면에 치장하면 할수록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 거대해진다는 걸 믿는 그들이다. 부인은 자신의 슬픔을 위해 벨렌에게 차를 우리는 법을 알려준다. 이제 그녀는 벨렌에게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출처: <우아한 나체들> 스틸컷 4, 5 -부자들의 일방적 소통방식


벨렌의 존재를 자신의 입맛대로 규정하는 부자들의 사고방식은 나체족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부자들에게 나체족은 옷을 걸치지 않은 것도 비위생적인데, 밤마다 축제를 여는 몰상식한 짐승들로, 반드시 내쫓아야할 존재다. 그들은 나체족을 고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나체족을 고소하는 일은 부자들이 하는 일들 중 가장 가치 있는 일로 비춰진다. 자신들의 편의는 당연히 누려야만 하는 것이고, 나체족의 삶의 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부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완벽하게 보호하고자 전기 장벽을 나체족 마을과 부자 마을 경계에 설치한다. 그 장벽으로 인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비극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비극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분히 의도된 살인으로 표출된다.



3-2. 나체족의 상호소통 방식


나체족은 벨렌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그녀를 위해 연회를 열어주며 온몸으로 환영한다. 벨렌은 그들과 함께 매일 연회에 참여하고, 동물을 흉내 내며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향유한다. 

나체 상태로 서로 뒤엉키는 그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나체가 아닌 그들의 수평적인 관계와 도발적인 자유로움에 시선을 뺏긴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선 변화는 감독이 앞서 부자들의 생활 패턴을 보다 더 건조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적절하고도 비도덕적인 그들의 언행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던 관객이라면, 이미 그때부터 나체족에 속해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체족이 함께 모여 사는 목적은 ‘죽음에 맞서 우리 자유를 지키자’로 죽음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서로의 몸을 쓰다듬고, 매일 정기적으로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육체의 한계를 정신으로 이겨내고자 한다. 마을을 지키고, 가꾸는 모든 것을 함께 공평하게 나누며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평화롭다. 서로를 시기하고 폄하하는 비인간적 진실이 감춰진 부자들의 대저택이 그들에게 필요 없는 이유다. 오히려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것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나체족은 부자들과 달리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반면, 부자들을 대표하는 두 모자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오로지 화와 불평만 가득하다. 아들은 예민하기만 하고 엄마는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입지 않은 이들은 매일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털어놓는다. 시를 적어오거나, 개인적인 사랑에 대한 견해를 말하거나, 뜬금없이 명언을 말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나체족에게 언어는(비언어적 포함) 모든 소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귀중한 양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진정한 소통의 방식을 접하게 된 그녀는 매일 가만히 듣기만 했었던 행위에서 벗어난다. 이젠 앞치마를 입고 있어도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정할 수 있게 된다. 웃고 춤추며, 언제든지 당당히 자신을 내보인다. 

 


3-3. 모든 끝은 죽음으로


나체족 한 남성이 전기 장벽 근처에서 나뭇잎을 따다가 감전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나체족은 격렬히 저항한다. “자기 집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박탈할 순 없다!”라 소리치면서 부자들의 향해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절규는 부자 마을에게 닿지 않는다. 오히려 나체 마을이 폐쇄되자 부자들은 안심한다. 더 이상 몰상식하고, 저주스러운 나체족들을 보지 않고 평화롭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아한 나체들>의 끝은 죽음을 향하고 있다. 한 남성의 죽음은 개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공동체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나체족들의 삶의 목적이 죽음에서 나의 자유를 지키자 인데, 이미 죽음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심지어 그 비극을 몰고 온 주체도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나체족은 매일 서로의 몸을 쓰다듬으며 하나의 인간인 것처럼 함께 삶을 영위해왔다. 마치 유토피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것도 나체족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스킨쉽과 그들만의 시간활용법이 관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벨렌은 그곳에서 진정한 나를 찾았으며, 인생을 관통하는 죽음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전기 장벽 살인사건은 그녀를 결국 행동하는 자로 각성하게 한다.  

출처: <우아한 나체들> 스틸컷 6 -부인의 차에 약을 타는 발렌

벨렌은 나체 마을이 폐쇄된 것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한다. 매일 어깨를 숙이고 절뚝거리며 걷던 걸음걸이가 이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녀의 외면으로 나타난다. 벨렌은 부자 마을 주민들을 빨간 천을 쫓는 황소처럼 들이받기 시작한다. 모두 그녀가 가고자 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일하는 집으로 들어가 부인이 통화하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약을 차에 타 그녀에게 건네준다. 

자신의 앞에서 약을 탄 것조차 몰랐던 부인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은 다른 부자 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직 관객들에게만 총을 들고 전기 장벽을 넘어가는 나체족만 은밀하게 보인다. 관객은 <우아한 나체들>의 장대한 결말이 오기까지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버린다.

  

나체족의 복수는 잔인하며, 극단적이다. 벨렌은 집주인을 죽이고, 나체족은 부자 마을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총으로, 칼로, 도끼로 죽이기 시작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들의 총은 자유를 오직 약탈해간 이들에게만 향해있다.

이 모든 사건의 벨렌이 부인을 죽인 후 전기를 끊었기에 시작된다. 그 덕분에 나체족은 부자 마을을 단번에 습격한다. 이후 부자 마을의 사설 경비가 출동하고, 나체족과 경비들의 총싸움이 시작된다. 승리는 경비들의 몫으로 돌아가고, 나체족은 언덕에서 도살당한 것처럼 총에 쓰러져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우아한 나체들>은 그렇게 끝난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을까. 관객의 대화(GV)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왜 결말이 꼭 살인이어야 했나요? 다른 저항의 방식도 있지 않을까요?" 란 질문에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결말을 고민하면서 썼습니다. 2가지로 생각했는데. 하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체족의 대문을 닫아버리고 경비가 그들을 모조리 죽이는 결말이었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끝은 죽음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결말엔 죽음이 꼭 들어갔어야 했다. 그가 영화를 만든 이유는 나체족들의 목적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말하는 진정한 저항은 죽을 줄 알면서도 목적을 위해 죽음으로 향하는 그들의 역동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나체족이여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말이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의 흥분과 강한 의지로 가득 찬 의식적인 행위가 나체족의 총구에서 발현된다. <우아한 나체들>는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진 가장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4. 카메라의 시선  

<우아한 나체들>의 카메라 앵글은 모두 피사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평각촬영 앵글’로 촬영되었다. 모든 인물을 정면에서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사건과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제공한다. 그러나 <우아한 나체들>은 객관적인 감상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다분히 벨렌을 향한 연민과 나체족을 향한 자아성찰에 중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샷은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꾸준히 반복한다. 익스트림 롱 샷과 인물 웨스트 샷이 교차방식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고 간다. 



4-1. 익스트림 롱 샷과 인물 웨스트 샷 반복                                        


영화는 거대한 환경을 중심으로 모든 인물과 사건을 담아내는 익스트림 롱 샷과 화면 안에 인물의 허리까지 담아내는 웨스트 샷을 주로 사용한다. (스틸컷 1, 2, 3, 4, 5, 6)를 참고하면 알 수 있듯 인물을 관객의 바로 코앞에 위치시키면서도, (스틸컷 7)처럼 가장 멀리 갖다 놓기도 한다. 서로 극단적인 샷을 영화 내내 교차해 관객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관객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다가도 급작스럽게 벨렌의 무표정과 나체족의 행복하고 나른한 표정을 접하게 된다. 

출처: <우아한 나체들> 스틸컷 7

인물의 변화를 보여줄 때는 인물만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사건의 본질을 강조할 때는 인물을 가장 작게 담아 영화의 주제를 관객에게 직접 해석하라고 한다. 보통 익스트림 롱 샷은 보통 재해 영화에서 많이 쓰인다. 이를 <우아한 나체들>과 연결해보면, 평범하게 인간답게 사는 척하는 현대인들에게 나체족의 습격은 거대한 자연재해로 인식된다. 특히 나체족의 습격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피폐해진 현대인들의 일상에 경종을 일으켜주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제시한다. 쉽게 말해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이 벨렌 단 한 사람뿐이지만, 그녀의 생존은 곧 또 다른 나체족 마을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며, 일방적이기만 한 현대인들의 죽음이 계속되어야함을 암시한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나체족의 죽음과 부자들의 죽음을 담는 방식을 서로 달리 했다. 나체족의 죽음은 익스트림 롱샷으로, 부자들의 죽음은 웨스트 샷으로 찍었다. 나체족의 죽음은 관객들에게 자유를 위해 투쟁한 실천적인 행동으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게 한다. 반면, 부자들의 죽음은 순식간에 일어나 관객에게 시각적 충격만을 전달한다. 길을 가다가, 차에서 내리다가, 운동을 하다가, 집에서 잠을 자다가 등,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총에 맞는 일은 부자들에겐 일상적인 현실로 흐려진다. 총에 맞아 쓰러진 이들을 화면 안에 정형화해 담으면서 관객에게 이유 있는 대가를 생각하게 한다. 



4-2. 카메라에 갇힌 부자들과 자유로운 나체족 


또한 나체족과 부자들의 공간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부자들의 공간은 사각형과 같이 딱딱 끊어진 직선 이미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호화로운 저택이지만, 어떠한 공간에서도 여유를 느낄 수가 없다. 어둡고 음산하다. 벨렌이 그들의 공간에 있을 땐 더욱 그 효과가 관객에게 전달된다. (스틸컷16)처럼 부자들의 공간에서 벨렌의 위치는 항상 얽매여있다. 그들이 움직여야만 벨렌도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인물들이 카메라 앵글에서 사라져도 카메라는 부자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부자들의 존재는 카메라에 의해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물들로 묘사된다.          

                                 

출처: <우아한 나체들> 스틸컷 8 (어둡고 차가운 직사각형의 이미지를 갖는 부자 마을) /  스틸컷 9 (따뜻함과 소통이 느껴지는 원의 이미지를 갖는 나체족의 공간)


영화는 나체족의 생활을 부자동네 사람들의 생활보다 훨씬 자세하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롱테이크로 잡는 그들의 몸짓을 보면 꼭 유토피아에 있는 것 같고, 넓고 신비로움이 가득한 마을 안은 과거 중세시대 귀족들의 고급스런 연회장 같다. 

나체족의 공간은 원의 이미지를 주로 사용해 함께 소통하는 인간적인 느낌을 제공한다. 부자들이 부단히 움직여도 따라가지 않던 앵글은 가만히 숲 속에 누워 숨만 쉬는 나체족의 몸짓을 담기 위해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모두 담는다.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나체족의 평화롭고 긍정적 이미지를 끼워 넣는 것이다. 벨렌을 변화시킨 곳의 아름다움은 카메라의 친절한 움직임으로 접하고 확인할 수 있다. 관객은 머리를 풀고 나체족 속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살랑살랑 흔드는 벨렌을 통해 그녀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확인한다.                               




<우아한 나체들> 속 죽음의 의미 


인간은 한평생 각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규정하기 위해 애쓴다. 그 방법이 어떻든 끊임없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타인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의심은 또 다른 불안을 가져온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에 얼버무리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에겐 언제나 외로움과 공허함이 동반된다. 그리곤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어두운 공간들로 수많은 '나'를 밀어 넣는다.(어쩌면 외로움을 처음 느끼게 되는 요인은 바로 '나'를 찾기 위한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감독의 말에 의하면 이 영화 속 배경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폐쇄적인 부촌이다. 그러나 사실 그가 어디서 <우아한 나체들>을 찍었는지 보다, 그 장소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담아냈는지가 더 중요하다. 영화는 서로 너무나도 다른 두 마을 속에 벨렌을 투입시키면서 그녀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부자 마을의 숨 막히는 질서가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얼굴이라면, 나체족의 원초적인 몸짓과 날 것과 같은 질서는 우리 사회가 드러내려 하지 않는 진정한 민낯이다. 머리 아픈 규칙이나 벗어날 수 없는 사회규범에서 탈주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가질 필요 없이 그저 본능대로 뒹굴고 대화할 수 있는 나체 집단의 모습은 영화 제목 그대로 '우아'하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란 뭘까?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뭘까, 아니 정말 삶을 행복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부자들과 나체 집단의 간극이 저렇게 크고 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내면과 외면의 부딪힘일까. 성숙한 자아와 중심을 잡지 못하는 자아 간의 혼란스러움일까. 현재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질주하는 나를 위한 저항일까.



끝내 힘없이 널브러진 나체는
사실 사회적으로 형성된(만들어진)
각자의 '나'에게 도살당해버린
우리의 본능과 자유로움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우아한 나체인 '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 갖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과 자유를 갈망하는 욕망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온몸에 잔뜩 걸친 나와 나체인 나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벨렌의 삶은 앞으로도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자신의 옷을 벗어던질 것이다. 결국 끊임없이 고민하고 충돌하며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나아가 우리의 몫이니까.




<우아한 나체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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