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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Nov 03. 2016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

B#1 한창훈「주유남해」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




  사실 모든 부부의 삶은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관계는 존재할 수 없기에 부부는 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 적절하게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보이는 행동과 보이지 않는 행동을 구분해 끊임없이 반응해야 한다. 신뢰의 평행 저울을 만들어 함께 손잡고 올라가 한쪽이 치우지지 않게 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가 먼저 손을 놓을 때까지 서로 밀당 아닌 밀당을 해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신뢰는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사랑은 부부에게 가장 원초적으로 필요한 감정임 동시에 삶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영원한 사랑을 전제로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훈련을 거듭하며 부부애란 탑을 쌓아 올린다. 그래서 우린 연애와 결혼을 절대 동일 선상에 놓지 않다.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연애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희생과 감내, 그리고 배우자를 지속적으로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결혼의 사랑과는 분명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괜히 결혼식에서 서약을 반지를 나눠 끼며 신부님 앞에서 모든 요소가 들어간 집약적 맹세하는 것이 아닐 테니까.  

  

  세포댁과 오씨 부부의 삶은 벌써 삼십 년이 넘어가고 있다. 이혼한 아들의 자식을 맡아 제2의 자식을 키우는 그들. 세포댁은 집안일과 육아, 나아가 오씨를 도와하는 뱃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급격하게 힘들어한다. 그러나 그런 세포댁에게 오씨는 괜히 서운함을 느끼고, 급기야 반찬투정까지 하며 왜 자신을 더 신경 써주지 않냐고 성질낸다.

  나는 오씨의 반찬투정이 ‘노년의 성’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발단으로 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연 바닷속에서 끌어올린 오씨의 떨어진 체온을 위해 맨살로 그를 부둥켜안은 세포댁의 행동이다. 이미 많은 매체에서 노년의 사랑(성)을 다뤄 보여주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노년의 사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영원하고 안정적인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은 세월의 풍파를 함께 겪으며 생긴 자글자글한 주름만큼 성숙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깊은 신뢰감에서 비롯된 부부의 삶은 계속된 사랑의 아픔을 겪는 젊은이들이 보기엔 철옹성 같을 것이다. 그래서 노년의 사랑은 아름다움을 넘어 자연스럽고 매력적이며 따뜻하다. 괜히 세포댁와 오씨의 거친 대화가 서로를 더 위하고 아끼기 위한 방법으로 보이는 건 분명 그 이유 때문이다.  

  

  벌써 4년도 더 넘은 일이다. 여름방학 때 외할아버지 댁에 며칠을 지냈던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 댁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우린 교회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왔다. 도로 한복판에서 교회버스를 기다리는데, 대뜸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에게 면도기를 내밀었다.

  

  “나 목덜미 뒤에 난 털 좀 밀어봐.”

  

  “뭔 소리여? 쓸데없게…”

  

  “교회 가니까 그라지. 아 어서 밀어!”

  

  몸이 불편하신 외할아버지가 힘들게 외할머니의 목덜미 뒤에 난 털을 면도기로 밀기 시작했다. 나와 동생은 웃기 시작했다. 왜 웃음이 먼저 났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웃기 시작하자 외할아버지가 민망해하며 껄껄 웃기 시작했다. 외할머니 역시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날 외할머니의 목덜미를 내가 다시 말끔하게 밀어야 했지만, 난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깨끗하게 민 외할머니의 목덜미보다 외할아버지가 떨리는 손으로 등성 듬성 민 외할머니의 목덜미가 더 좋아 보였다. 훨씬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난 그 장면이 세포댁과 오씨의 사랑과 겹쳐 보였다. 동시에 ‘에로스’가 떠올랐다. 에로스의 어원은 플라톤의 사상에서 처음 출발했다. 본래 인간은 네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인간이 신의 반기를 들어 두 명의 남과 여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끊임없이 다시 합쳐지기 위해 자신의 짝을 그리워하고 찾는다고 했다. 바로 그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씨를 살리기 위해 한 세포댁의 행동은 에로스에서 비롯되었다. 만약 에로스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들의 행위를 설명하고 우리가 원하는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단순히 서로 마음이 맞고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 그게 사랑의 시작이라 할 수 있지만 사랑의 끝이라곤 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노부부의 에로스적 사랑은 나에겐 인상적이었고 또 매력적이었으며 따뜻했다. 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생각나 그런 것이라 부정하진 않겠다. 명백한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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