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 장정일 「프로이트식 치료를 받는 여교사」
‘프로이트’하면 꿈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프로이트는 현실에서 이루고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꿈에서 여과 없이 표출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무의식은 바다 아래 감춰진 거대한 빙산이다. 인간의 의식은 표면 위에 드러난 빙산의(무의식의) 일각인 셈이다. 사실 어딘지 모르게 무의식은 그 단어 자체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의식적으로 나누는 대화보다 무의식적으로 나누는 대화가 더 기억에 남지 않는 것도 어쩌면 우리의 머릿속에 너무 많은 단어들이 떠다녀서 그런 것은 아닐까.
2학년 때 시를 쓸 때마다 나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내 무의식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분명 엄청난 힘을 시에 불어넣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나는 글을 쓸 때면 머릿속을 비우는 연습을 한다. 내가 생각하고 정리한 것만 쓰는 것보다 나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던 원초적인 느낌들을 함께 곁들어 독자에게 전달을 더 잘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의식은 정말 알기 쉬우면서도 너무나도 어렵다. 그 감춰진 빙산을 다 파악하고 녹여 마시기에는 터무니없이 크니까.
즉, 우린 아무리 애를 써도 무의식의 모든 것을 절대 파악할 수 없다. 사실상 무의식을 경험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들은 다분히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무의식은 기대할 수도 없고, 준비할 수도 없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 그리고 욕망 덩어리다.
주인공 여교사는 프로이트식 치료를 받고 있는 과정에서 자신이 느꼈던 부분을 그대로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한다. 먼저 나는 그녀가 교사라는 점에 주목했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 교사는 진정한 교사의 덕목에 해당하는 규칙들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규칙들은 모두 인간적, 도덕만을 요구한다. 정확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들은 그 틀을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덧붙여 그 규칙들은 대부분 개인의 욕망을 절제하고 중용의 자세를 가져함을 주장한다. 나의 머릿속에도 학생들 앞에서 제일 교양 있고 정숙한 척하는 교사의 정형화된 모습이 생생히 남아있다.
하지만 교사들도 자신의 욕구를 표출해야 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어떤 행동이든 자신의 감정을 제때 풀어야 한다. 그냥 감추거나 숨기거나, 무시한다면 스스로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끝엔 ‘범죄’가 있다는 점도 알아둬야 한다. 나는 그녀의 욕망 분출의 시작이 바로 교사 생활이라 본다. 그 끝 역시 아직 나오질 않는 것을 보면, 꽤 오랫동안 그녀는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하나 생각해보자. 그녀가 충분히 우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가? 나는 동의한다.
그녀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는 내 손에 닿지 않는 간지러운 부분까지 시원스럽게 긁어주었다. 점점 더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중에서도 사랑한다고 말한 남자를 곧바로 싸대기 때린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무엇이 자신의 얼굴이고 자아인지 분간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다짜고짜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뺨을 때린다. 과연 그녀의 손바닥엔 무슨 화가 가득했을까. 정답은 바로 이것이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그녀와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한창 공부와 글쓰기를 동시에 빠트리지 않고 하는 것이 힘들었던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마음이 급해 괜히 짜증만 늘어나곤 했었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지, 나아가 내가 하는 일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로 끝맺음을 했는지 의문이 가득했고, 그 의문은 결국 스트레스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그때 나에게 한 친구가 “넌 둘 다 잘하니까 좋겠네. 어디 좀 알려줘라. 어떻게 하면 되는지.”라고 장난스럽게 얘기했다. 난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너나 잘해. 왜 나한테 괜히 시비 거는 거야? 신경 꺼.”라고 소리쳤다. 정말 화가 났었다. 순간적으로 욱해 소리친 것이 그 친구에겐 당황스러웠겠지만. 이미 다 쏟아낸 뒤였다. 주변 친구들은 내가 당연히 잘한다고 여겼지만, 사실상 난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고 그들의 고민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었다.
‘네가 아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난 모르겠는데, 네가 아는 내가 정말 나라고 말하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뭐야?’
여교사는 겁탈하는 꿈을 꾼다고 말한다. 그것도 매일 학생들에게. 그것은 그녀가 숨겨온 욕망의 끝이 아닐까. 어떤 여성도 겁탈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몸을 파는 매춘부도 겁탈이 아닌 자신의 직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에 뛰어드는 남성들에게 꿈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당한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녀는 독불장군이 되어있었다. 현실에서 실현시킬 수 없었던 각종 욕망들이 겁탈로 표현되고 있었다. 진짜 겁탈을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해하기에는 치료를 위한 그녀의 목적이 너무 협소하게 이해될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겁탈당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꿈을 꾸고 싶다고 한다. 현실에선 하지 못하는 것들이 그렇게나 많을까. 가면을 벗고 겁탈당하는 본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욕망은 그녀가 처녀라는 점에서 더 극대화된다. 스물아홉 살까지 처녀로 살아온 것이 곧 그녀의 콤플렉스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콤플랙스를 고백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한 그녀의 말투는 툭툭 던져놓은 더러운 빨랫감들 같았다.
메이커를 좋아하고 자신이 사는 옷들은 모두 유행하는 옷이며 명품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미친 쇼핑중독이라 불러야 할까. 외로움이 의식주보다 더 간절한 사람이 그녀만 있을까? 이 삶을 사는 모든 사람에겐 무의식 속에 피어나는 꿈들이 있다. 그 무의식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계기와 그 요소가 각각 다르다는 것도 명백한 진실이다. 그녀의 세계는 틀에 박힌 윤리와 강요된 자격요건, 극복할 수 없는 콤플렉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나의 세계는 막연한 외로움과 허무감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요새 효과가 좋은 나만의 치료법은 영화보기다. 그리고 어떤 영화든 그때마다 본 영화는 모두 만족스럽다. 이미 내가 선택한 영화는 재미있으며, 뛰어난 예술작품이니까.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정당화를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입은 옷들이 모두 명백한 명품이라는 점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그녀가 쇼핑을 하는 목적과 내가 영화를 보는 목적은 동일하다.
나는 콤플렉스가 사람에게 적절한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아무리 아픈 콤플렉스라도 너무 배척하고 아파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먼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자신을 이해하고 타협해 조금씩 용기를 가지고 드러낸다면 어떨까. 물론 그녀는 프로이트식 치료방식으로 자신의 숨겨진 모습들을 발견하고 있다.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뭐든 스스로 움직이고 행동해 배우고 느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러나 이젠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빨랫감을 깨끗하게 빨아버려야 한다.
나는 그녀가 좀 더 마음의 긴장을 풀었으면 한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엠씨로 활약하고 있는 박지윤 전 아나운서는 ‘욕망 아줌마’로 불린다. 그 수식어는 주부의 일과 밖에서 돈을 버는, 즉 다방면으로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다 해내는 그녀의 행보에 감탄한 네티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리고 우린 그 수식어에 대단함과 존경심, 부러움을 잔뜩 담아 그녀를 부른다. 그녀의 당당함도 좋아 보인다. 그 욕망하고 여교사가 말하는 욕망하고 같지 않다고? 여교사의 욕망은 깨끗하게 빨아져 건조대에 널린 박지윤 전 아나운서의 욕망의 과거다. 빙산의 일각은 어쩔 수 없이 현실에서 더 가혹하게 드러나있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그저 해석으로 우리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닐 뿐이다.
우린 자연스럽게 욕망아줌마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해 삶을 보다 더 긍정적으로 사는 법을 길러야 한다. 너무 과하고 오버한다고 생각해 말조차 조심스러웠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 모두 시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적절하게 욕망을 표출하는 법을 깨닫는다면, 적어도 하루하루를 꿈에서만 대리만족하며 흘러보내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