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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Mar 06. 2019

꺼지지 않는 빨간 불, <포항>

각자의 방식으로 떠나보내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포항 Pohang Harbor , 2014 제작  

한국 |  드라마 |  2019.02.27 개봉 |  12세 이상 관람가 |  93분

감독 모현신

     

     

꺼지지 않는 빨간 불, <포항>

     

     

<포항>의 초점은 명확하다. 아들과 아버지가 실종된 후 고향(포항)으로 내려와 그들을 잊지 못해 매일 바다만 바라보는 한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다. 주로 카메라는 방관자로서 인물을 거대한 자연환경에 숨겨놓으며, 그의 행동에서 극한의 감정을 끄집어낸다. 부모를 잃은 자식인 동시에 자식을 잃은 부모로 삶의 의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연수’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게 이 작품의 목적이다. 

출처: 영화 <포항> 중

연수는 좋은 머리와 손재주를 갖고 있음에도, 시골 포항으로 내려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의 주된 일과는 배 위에서, 집 앞에서, 부두 끝에서, 일하는 창고 안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보는 일이다. 그는 여전히 아들과 아버지가 돌아올 거란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마음의 문을 일찍이 걸어 잠갔다.  


도통 움직이지 않는 연수만큼이나 그의 주변 인물들 역시 수동적이다. 혜련(여직원)은 연수를 가만히 응시하는데 하루를 다 보내고, 매일 술에 중독된 사장과 자기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불만인 연근(동생)은 연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그들은 자신의 결핍을 해결하지 못한 채, 가족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연수를 잡고 늘어진다. 마치 모든 원인이 그에게 있는 것 마냥 그를 통해 고된 인생의 지표를 없애고 싶어 한다. 

출처: 영화 <포항> 중

<포항>은 배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와 연수의 침묵이 충돌하는 순간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지점에 새로운 인물이나 사건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이는 연수의 그리움과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다.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는 그의 뒷모습과 옆모습, 앞모습은 <포항>만의 내밀한 시선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연수의 모습은 점차 익숙해진다. 즉, 주인공의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 담긴 장면이 모두 똑같아 보이면서, 그의 침묵은 뒤로 갈수록 지루해지고 마는 한계에 직면한다.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연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이미 그는 하루를 전부 침묵하는 데 사용한다. 가 오히려 사장과 연근처럼 그를 다그칠 것인지. 혜련처럼 가만히 지켜봐 줄 건지 고민하게 한다. 물론 어떠한 선택도 뒷맛은 전혀 개운하지 않겠지. 그건 팩트다.  

출처: 영화 <포항>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수는 기울어진 삶의 방향키를 바로잡기 위해 자기만의 속도로 움직인다. 본 작품에서 필요한 유일한 능동적 움직임이 가장 위태로운 인간에게서 발현되는 것이다.

     

“배 한번 타자.”

     

긴 침묵을 깬 연수의 말 한마디가 <포항>이 다루고자 하는 죽음이고, 선택이다. 대자연 앞에선 한없이 작기만 한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과의 동행은 너무나 가혹하다. 그러나 연수에게도, 우리에게도 별다른 수가 없다.

혜련이 연수의 주머니에 넣은 볏짚으로 만든 작은 나룻배가 그를 움직이게 하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아버지의 배를 팔자는 동생은 “그래 팔자.”란 말까지는 아니어도 배를 처분하자는  암묵적 동의를, 형의 그 비스름한 몸의 언어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수는 처음부터 각자의 불안 속에 침묵하는 주변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서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출처: 영화 <포항> 중

그 누구도 자신이 품은 깊은 어둠을 바다로 흘려보낼 수 없었으므로. 오직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결국 그의 가슴 아픈 그리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연수는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함을 느낀다. 이미 현실의 아픔에 무뎌진 동생에게서 자신의 단호한 결정이 필요함을 말이다.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감정,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과 공허함. 그래서 그는 결정한다. 볏짚으로 만든 아들과 아버지를 데리고 바다로 나가, 아버지를 먼저 자신의 심연에서 세상 밖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끝내 할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한다. 부모의 죽음은 함께 늙어가는 의미로 동행할 수 있으나, 자식의 죽음은 어떤 행위라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포항>의 결론이었을까.
주인공은 육지로 떠밀려온 아버지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불씨 속에 집어넣는다. 장례조차 자신의 손으로 치러주지 못한 한이 재가 되어 부둣가에 흩날린다. 원망과 사랑, 애절한 그리움이 포항에 흩어질 때 배 위에서 어린 아들 품에 안고 흐느끼던 연수가 오버랩된다.

연수가 두 사람의 부재를 인정하며 자신에게 영영 찾아오지 못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순간, <포항>에도 드디어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빨간 불이 켜진다.


어떤 침묵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 아픔을 동반한 침묵이라면 더욱 그렇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말이 곧 슬픔의 전부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영화 전반에 안개처럼 깔린 정체된 고요함이 주는 통증과 같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스산함처럼.


가까스로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한 그가 앞으로 웃으며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이해한다고 해서 말 그대로 고민을 툴툴 떨어내듯 잊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매일 부둣가에 홀로 앉아 아버지의 배에서 아들과 함께 했던 시간에 얽매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배를 만들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바다에 던지겠지.
그렇게 수백 번 같은 행동을 하면서 지독한 그리움을 견딜 것이다. 

그래도 응원한다. 그의 선택이 어떻든 빨간 불은 계속 켜있었으면 한다.










         

PS.  이 글의 일부는 페이스북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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