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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히치하이크, <히치하이크>

그 다짐이 찬연할 뿐

by 우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치하이크 A Haunting Hitchhike , 2017 제작

한국 | 드라마 | 2019.03.14 개봉 | 12세이상관람가 | 108분

감독: 정희재



서로에게 히치하이크, <히치하이크>



영화를 보는 내내 왜 하필 제목이 ‘히치하이크’일까 생각했다. 히치하이크는 연고조차 없는 시골에서 길을 잃은 정애와 효정이 새로운 사건에 빠질 수 있도록 하는 연결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히치하이크>는 히치하이크가 아니고서는 결코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작품이다. 정애를 따라다니는 햇볕과 햇살을 따라가기 시작한 정애가 이를 반증한다.

이는 곧 희망으로 나타난다. 정애가 만난 첫 번째 희망은 엄마의 이름으로 배송된 우편물이었고, 두 번째 희망은 언제든 함께 해줄 수 있는 친구(효정)가 있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건 두 희망이 정애에겐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 엄마란 존재는 아빠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효정의 우정은 정애의 외로움을 모두 해소해주지 못했다.

d8d6ed2da0664f74b741627de94d0fa21552024794525.png 출처: 영화 <히치하이크> 중

정애는 틈만 나면 쓰러지는 아버지에게 약물 치료나 수술을 권유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를 대신 책임져줄 능력도 없다. 그저 열여섯 살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설상가상으로 아빠는 정애에게 “아빠는 포기하니까, 마음이 편해,”라는 잔인하고도 무심한 말을 내뱉는다. 그저 홀로 남겨질 딸에게 더 큰 짐을 짊어주고 싶지 않은 처절한 사랑이 가득하지만, 이미 정애는 가슴 깊이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아빠 없이 살아야 할 삶은 어린 정애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미래였으니까.


정애는 결국 현웅의 곁으로 히치하이크를 감행한다. 정애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희망은 하필 효정의 친아빠인 현웅과의 만남으로 발견된다. 현웅에겐 정애와 같은 결점이 존재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아들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현웅과 죽어가는 아빠를 지켜만 봐야 하는 정애는 서로에게서 같은 냄새를 맡는다. 아픔과 절박함. 도로 위에서 용기를 내 손을 흔들며 서로의 차에 타기 위해 둘은 끊임없이 답 없는 물음을 주고받는다.

db2f69f8418c45c38677da2894d794601552024852584.jpg 출처: 영화 <히치하이크> 중

자기를 자의로 타인에게 맡기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임에도, 가끔 사람들은 현재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타인의 삶으로 히치하이크한다. 그게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고, 현실을 잊고자 하는 방책일 수도,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정애와 현웅처럼 서로를 통해 모호한 안정감이라도 느끼고 싶어 그럴 수도 있다.

정애는 아빠에게 바랐던 모습을, 현웅은 아들에게 바랐던 모습을 서로에게서 발견한다. 정애는 무너지지 않을 부모의 울타리가 필요했고, 현웅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 자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행은 동전의 양면을 갖고 있다. 정애가 원했던 희망은 헛된 마음의 부산물이고, 사실 가장 원하지 않은 진실과 뒤섞어져 있었다. 그녀가 외면하고자 했던 삶 속에는 사랑하는 아빠와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의 자장가를 더 이상 녹음된 카세트로 듣지 않아도 될 희망도 분명 존재했다.

b917c6fdf4f84f24a280f2d2717999d41552025268900.jpg 출처: 영화 <히치하이크> 중

히치하이크는 온전히 요청하고 받는 이들의 몫이다.
자유라면, 완벽한 자유다.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다.

결국 “별거 있겠냐, 그래도 포기하지 마.”란 효정의 말로 완성되는 게 삶이다.
친구 효정은 엄마와 자기를 버린 아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정애와 길을 떠났었다. 그리고 현웅이 자신의 아빠임을 짐작한 순간, 방황하는 정애와는 다르게 자신이 걸어갈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미 지난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렇게 그립고 원망했던 아빠를 되려 모른 척해버리는 결심. 그것은 병실 침대에 누워 숨만 쉬는 자신의 아빠를 외면하고 현웅을 아빠라 믿고 싶었던 정애의 마음이 돌아서는 계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책임지는 일은 차후의 문제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만 가질 수 있는 자격이다. 이를 단순히 어리석은 행위라 욕할 수 없는 것은 <히치하이크>의 말처럼 간혹 ‘헤매다 마주한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발견한 빛을 어찌 매몰차게 외면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잃어버릴 아빠의 빈자리가 코 앞에 다가왔음을 예감한 사춘기 딸이 말이다.
물론 결코 신비롭거나 아름답기만 한 희망은 아니다. 현웅의 삶에서 희망은 되려 정애였으니까. 서로에게서 원했던 단편 조각을 봤던 것이다. 그래서 어색하고 더 애잔하지만, 그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쉽게 포기하고 외면할 수 없었다.

c8f319f376f744aa994d64c2089bc7641552024752973.jpg 출처: 영화 <히치하이크> 중

정애는 딸을 위해 병원 치료를 받지 않는 아빠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자신이 가진 희망이 결코 좋은 방법과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연민을 품고 안쓰러워했던 마음이 극한의 외로움과 두려움에 속고 있었다는 것을. 현웅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 소녀는 친구가 찾던 존재(아빠)가 당신임을 밝히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나아간다. 효정과 인사를 나누고, 계속될 자신의 삶을 위해.


정희재 감독은 ‘<히치하이크>는 열여섯 소녀가 스스로 바라 왔던 희망을 포기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이 도망쳐 온 곳으로 용기 내어 되돌아가는 이야기다.’라고 얘기했다. 정확한 표현이다.


사실 정애의 선택은 특별하지 않다.

그녀의 앞에 주어진 현실을 다시 걷겠다는, 그 다짐이 찬연할 뿐이다.













PS. 이 글의 일부는 페이스북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도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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