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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Apr 15. 2019

애나와 재능의 존재
<나의 작은 시인에게>

사랑하는 누구든 될 수 있으니.

나의 작은 시인에게 (2018)

The Kindergarten Teacher

감독: 사라 콜란겔로

드라마 / 미국 / 2019.04.04. 개봉 / 97분 / 15세 이상 관람가   

     

애나와 재능의 존재. <나의 작은 시인에게>

     

나는 ‘재능’이란 단어를 싫어한다. 자신의 한계에 직면한 사람들이 제일 빈번하게 내뱉는 단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마치 신의 뜻인 것 마냥 “저에겐 재능이 없나 봐요.”라고 말하곤 하니까. 사실 ‘신이 주신 재능’이란 말도 웃긴 표현이다. 도대체 재능의 귀함과 천함을 누가 결정하는가. 보통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모두 귀한 예술적 재능이라 할 수 있을까. 한 시인이자 교수는 ‘섬세함’과 ‘예민함’, 그리고 ‘결핍’을 가진 사람 중 몇몇 사람에게서만 놀라운 재능이 발견된다고 강조하며 자신을 슬며시 끼워 넣었다. 재능을 갖기 위해선 높은 스펙이 갖춰져야 한단 말인가? 취업 준비생과 뭐가 다른가? 불행하게도 나 역시 그 질문에 자유롭지 않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 얽매여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나에게 혼란스러운 작품이다.


출처: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리사는 본인의 예술 욕구를 채우지 못한 채 무료한 인생을 살고 있다. 야간수업으로 시를 배우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녀의 시는 수학 공식처럼 복잡하고, 재미없다. 물론 강사와 수강생들, 심지어 자신에게서 나온 평가다. 평범한 인간으로 의식주만 충실히 해결하는 삶은 심장이 없는 로봇의 삶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천재 꼬마 시인 지미를 만난다. 리사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지미의 시를 야간수업 과제로 제출한다.


처음엔 지미의 시를 발견한 자신의 위대한 눈썰미를 확인받고 싶었을 것이다. “나에게 예술적 재능은 없지만, 예술을 알아보는 눈은 있어.” 같은. 이내 리사는 지미가 중얼거릴 때마다 하던 일을 제쳐두고 종이에 받아 적는 데 모든 열정을 소비한다. 끊임없이 지미에게 다양한 경험과 이야기를 들려주며 억지로 ‘시’를 끄집어 내려한다. 심지어 모차르트급 재능을 어둠으로 처박으려는 모든 이에게서 지미를 지켜야만 하는 삶의 목적도 갖게 된다.


리사는 내가 정말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을 알까. 그녀는 아무개가 말한 3가지 조건에 부합한 사람이다. 지미에게서 시를 발견할 정도로 섬세한 시선을 갖고 있고, 자신의 예술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스스로 결핍을 만들어내는 평범한 여자다. 사람들은 평범한 것이 제일 어렵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절대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사가 말하는 예술은 사실 보통의 존재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평범하다는 말속에 모차르트 급 예술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저 리사가 지쳐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후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출처: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나는 한때 참견쟁이였다. 리사처럼 타인에게서 조금이라도 신기한 능력을 발견하면 어떻게든 그들에게 매달렸다. “제발 재능을 낭비하지 마!”라고 말하면서. 돌아보는 대답은 다양했으나 결말은 지미와 같았다. 911에 신고해 납치당한 자신을 구해달라는 말과 시가 떠올랐다며 경찰차 안에서 리사를 찾는 행동이 뒤섞인 채 나에게 되돌아왔다.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주제넘었고 바보였다. 리사처럼 그들의 재능은 내가 쉽게 다가가지 못할 영역에 있다고 믿었다. 원래 남을 동경하는 게 나를 자책하는 것보다 쉬운 법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리사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가 주제넘을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보이지 않는 재능에 고통받는 수많은 이 중 ‘리사’를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뚜렷한 감독의 견해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삶의 방식이 뚜렷한 인물들이 영화의 의미를 채우고 있어 지루하진 않다. 애나를 사랑하는 지미와 지미에게서 자신의 예술을 발견한 리사, 수입이 곧 현실이라고 믿는 지미의 아빠와 돈벌이는 시원치 않지만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지미의 삼촌, 그리고 그 외 등장하는 사람들까지.


이 작품은 명확한 프레임을 갖고 있다. 재능이 있는 지미와 재능이 없는 리사의 이야기가 상벽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본 구조는 좀 다르다. 딱 하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할 줄 모르는 리사의 이야기다. 부디 많은 사람이 <나의 작은 시인에게>를 보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미의 천재적 예술성은 그의 몫이다. 좋은 안내자가 있음 분명 좋겠지만, 리사 같이 브레이크 없는 대리자는 필요 없다. 아름답고 당당하던 그녀가 결국 범죄를 저지르게 된 까닭은 잘못 끼운 첫 단추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해 놓고 스스로를 무시하고, 긴 시간 부끄러워했다.


이제라도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으면 한다. '결핍이 가득한 나'를 애나라고 해도 좋겠다.

지미의 말대로 애나는 사랑하는 누구든 될 수 있으니.

     

애나는 사랑하는 누구든 될 수 있어요.
제 경우엔 유치원 보조교사 매건 선생님이에요.   

          

출처: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글_관객동아리 씨네몽 김진실



PS.  이 글은 페이스북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전주독립영화관 관객동아리 '씨네몽'회원으로 개봉작(무료)을 본 후 리뷰를 올리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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