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란 Jun 03. 2019

<파리의 딜릴리>의 시작과 끝, 딜릴리

영화, 브런치무비패스- 지루할 틈이 없는 영화 

* 브런치 무비 패스 #5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의 딜릴리> Dilili in Paris , 2018 제작  

프랑스 외 |  애니메이션 외 |  2019.05.29 개봉 |  전체관람가 |  94분

감독: 미셸 오슬로



<파리의 달릴리>의 시작과 끝, 딜릴리 


출처: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 <파리의 딜릴리>의 중심점, 딜릴리

딜릴리는 아이답지 않다.   

이 꼬마 숙녀에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눈과 입있다. 모든 이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넓은 사랑의 힘. 솔직히 그 작은 품에 들어간 사람이 어디 영화 속 수많은 예술가 뿐이겠는가. 관객 모두가 새하얀 원피스와 노오란 리본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파리의 딜릴리>는 영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딜릴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녀는 완벽한 주인공이다. '고심하는 인간'이 아닌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영화의 중심을 완벽하게 잡고 있다.

영화는 '딜릴리의 파리 구경하기'를 통해 메인 사건인 '마스터맨에게 잡혀있는 아이들을 구출하기'를 해결한다. 주인공 딜릴리는 모든 사건에 선봉에 서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관객은 이를 전혀 낯설어하지 않는다.


아이의 감탄스러운 언어와 사랑스럽고 당당한 행동은 늘 사건 해결에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꾸준히 다양한 작품을 통해 편견과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던 감독은 본 영화에서도 수시로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한다. 모두 딜릴리의 조그만 입을 통해서 말이다. "영어를 할 줄 아니?"라고 물어본 오렐과의 첫 만남, "원숭이가 왜 여기 있어?"라며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하한 르뵈프와의 대화, 이방인이 사건을 해결했다는 떠들썩한 언론을 향한 독백 장면 등, 딜릴리는 그 모든 장면에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그들의 편견에 날카로운 유머를 날린다. 이런 장면들은 편견과 차별에 익숙했던 당시 프랑스 사회(벨 에포크 시대)의 민낯을 의미한다.  


손꼽을 장면은 첫 장면에 등장하는 짧은 오프닝이다.

한 카나긴 가족이 등장한다. 오빠는 피리를 불고, 엄마는 음식을 차리고, 아이는 엄마의 심부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을 보내는 가족에게서 점점 카메라 앵글이 멀어지고, 오색빛깔을 뿜어내는 백인들의 뒷모습이 등장한다. 벨 에포크 시대 속 '인종 동물원'의 한 장면이다. 그리고 당근을 자르던 딜릴리는 동물원 안에서 백인 아이 오렐을 만난다.


딜릴리는 인종 동물원에서 일한다. 웃통을 벗고 고향 언어를 하면서 백인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전시한다. 고향에서는 희다고, 프랑스에서는 검다고 차별받지만 아이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유지한다. 그녀는 이미 흥미롭고, 경멸스러운 시선에 익숙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이미 딜릴리는 자신의 뿌리를 파리에 심었다. 파리 군중 속에 섞여 사는 삶을 말이다. 따라서 밖에서도 이어지는 인종 동물원을 향한 눈빛을 견디는 건 호기심 대장 딜릴리에겐 식은 죽 먹기다. 


"저녁에 일이 끝나, 끝나고 보자!"라며 오렐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한 후 벗고 있던 웃통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집채만 한 마차를 타고 집에 가는 딜릴리의 모습이 <파리의 딜릴리>의 첫 번째 반전이다.

 

오프닝만 봤는데도, 이 꼬마숙녀를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은가?

'도대체 저 소녀는 누구지?'란 궁금증은 <파리의 딜릴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다름없다.

미셀 오셀로 감독의 작품들은 그런 멋이 있다. 오로지 '호기심'만으로도 충분히 관객을 눈과 귀를 사로잡는 멋.

출처: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 벨 에포크 시대 속 딜릴리

감독은 영화 속에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총출동시킨다. 또한 프랑스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그 시대의 화려했던 거리와 건축물들을 빠짐없이 보여주며 관객에게 황홀함을 선물한다. 치열한 현장 스케치를 통해 사실적으로 그려낸 파리의 거리는 딜릴리가 활동하는 메인 무대로서 부족함 없이 기능한다.


오렐와 아이의 '마스터맨 찾기'는 예술가들과 빈민가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접점이라곤 없는 양날의 검은 두 아이의 탐정수사 덕에 자화자찬하던 벨 에포크 시대의 명과 암을 한 번에 베어버린다.

날카로운 감독의 묘사법은 뛰어난 영상미로 발현되어 딜릴리의 서사에 엄청난 힘을 실어준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과 빈민가들의 눈에는 딜릴리는 전혀 다른 선상에 서 있는 인간이다.

쉽게 말해 아이는 이들의 정반대에 서 있다. 

심지어 딜릴리는 당시 파리가 가장 추구했어야 했던 정점에 서서 경쾌하게 줄넘기를 한다.

"이젠 내가 파리의 사람들을 구경할 차례야!"라고 소리치면서.

아름답다고 치장하기만 바빴던 그들의 모른 척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인종문제를 넘어 여성인권의 문제로.

출처: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 인종 문제와 여성의 인권문제의 선봉에 선 딜릴리 

'네발'은 남성우월주의자들이 여성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마스터맨들은 여성이 남성의 지위를 위협한다며 그들을 모조리 '네발'로 만들려 하는 음모를 꾸민다. 여성을 네발로 기어 다니게 길들여 남성의 지위와 권력이 다시 프랑스를 부흥의 시대로 이끌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 여성을 길들이는 것에 한계를 느끼자, 어린 여자아이를 모조리 납치하기에 이른다. 처음부터 아이를 가르치는 게 더 쉬고 빠를 거란, 오만하고 멍청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딜릴리까지 납치한다. 


일반인들은 만나기 힘든 예술가들은 전부 오렐과 연결된다. 여러 사람의 심부름을 하던 그는 파리의 소식통이었고, 덕분에 누구보다 더 빠르게 비극적인 사건(마스터맨의 여아 납치사건)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꾼의 자전거에 딜릴리가 탑승한다. 심부름을 하는 청년과 인종 동물원에서 일하는 소녀의 만남은 벨 에포크 시대에선 그리 눈에 띄는 조합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렐은 사회계층에서 가장 밑에 위치했고, 딜릴리는 인종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두 아이가 자신의 집 앞마당을 뛰어다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납치 사건이 터질 때마다 호들갑 떨며 손바닥으로 입을 가릴 뿐.

(파리의 전경만큼은 둘에게 친절했다. 두 사람이 자유롭게 파리의 거리를 쏘다니며 여야 유괴 사건을 조사할 수 있었던 이유다.)


딜릴리는 피카소와 프리다 칼로, 드가, 툴루즈 로트렉, 모네, 르누아르, 로댕, 카미유 클로델, 파스퇴르 박사, 마리 퀴리, 콜레트 등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수첩에 그들의 이름을 적는다.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따뜻한 심성은 그녀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마다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며 딜릴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응원하고 도와준다.  


마스터맨에게 납치당한 딜릴리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네발로 기어가는 훈련을 받게 된다. 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무섭다고 울지도, 두렵다고 마스터맨의 말에 납작 엎드려 움츠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짝이는 기지를 발휘한다. (딜릴리는 오렐과 함께 만나온 예술가들의 이름을 쪽지에 적어 하수구에 흘려보낸고, 이후 칼베 부인과 오렐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위대한 마스터맨도 딜릴리에겐 적수가 되지 못한 것이다. 단순히 아이의 순수함이 아닌 딜릴리의 강인한 심성과 바른 마음가짐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이후 거대한 비행선으로 마스터맨의 소굴에서 납치된 아이들을 모두 구한다.

출처: 영화 <파리의 딜릴리> 스틸컷

 <파리의 딜릴리>는 딜릴리에서 시작하고, 딜릴리에게서 끝난다.


영화파리의 상징, 에펠탑에서 납치됐던 아이들을 부모의 품에 돌려보내며 끝을 맺는다. 감독은 끝까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에 딜릴리를 위치시킨다. 

딜릴리가 벨 에포크 시대에 가장 필요했던 인간상이다. 자유와 평등, 박애를 의미하는 인물로.  


모든 건 딜릴리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이뤄졌다. 그녀의 판단과 의지가 빠르게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관객의 눈엔 화려한 파리의 거리가 펼쳐졌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사건이 진행되었고, 그 중심에는 딜릴리의 담대함과 사랑스러움이 있었다. 

아이는 포옹을 처음으로 배운 순간부터 더 크게 자신의 팔을 뻗었고,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위협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잰틀했고, 상냥했으며 심지어 교양 있었다. 


<파리의 딜릴리> 역시 전작 미셀 오슬로의 작품들처럼 화려한 동시에 날카롭다. 그의 영화는 아무리 반복해서 봐도 지루하지 않다. 딜릴리 역시 마찬가지다.  

<파리의 딜릴리>의 메인 포스터

 

매거진의 이전글 결코 지겹지 않다, 김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