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편견의 수명
단상#12. 그날엔 꼭 기도를 해야만 했다.
단상#12. 내가 가진 편견의 수명.
감정 기복이 심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역시나 내게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고 나무랐다.
자기처럼 좀 산만해져도 괜찮다고 커피를 3잔이나 연달아 마시며 얘기했다.
생각이 고민을 만드는 것은 고만고만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 고민이 행동이 아닌 또 하나의 편견으로 자리하는 게 나의 가장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억울하고, 어처구니없었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이 명제는 나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다.
나는 참 여러 종류의 편견을 갖고 있다.
정확하게는 모두 사람에 관한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문제는 내가 그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본래의 편견에 살을 붙이는 게 더 쉽다는 점이다.
그것을 엄마는 "절대 너는 타협하지 않잖아."라고 에둘러 표현했는데 그것이 나에겐 더 충격적이었다.
할아버지 기일을 맞이한 날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고모부, 고모 가족에 대한 나의 팻말은 '한숨'이었다.
고모부는 목사님이다. 평범한 대가족처럼 우린 시간이 되는 가족들만 모여 예배를 드렸다.
3주년이었으니, 이번이 목사님에게 듣는 3번째 설교 말씀이었다.
사실 고모부가 언제부터 목사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목사님을 하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사업을 실패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겪었을 고통은 나의 아빠가 느꼈을 삶의 무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곁에 있을 기회의 문을 열기에는 충분한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했고 그 결과 목사직을 받아들였다. 목사님이 된 후 우린 한동안 고모부를 뵙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사로 설교를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역시 대가족에서 시간이 되는 가족들만 고모부네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들 애매한 표정으로 예배를 드렸고, 한참을 땀을 흘리며 버벅거리던 고모부를 애써 못 본 척하며 교회 주변의 경관을 칭찬했다. 그리고 저마다 지갑을 열어 조카들의 손에 용돈을 쥐어줬다. 그렇게 각자 오빠들로서의 책임을 이행한 후에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회를 둘러싼 흙밭을 떠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아빠는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고모네를 향해 대단함과 안쓰러움을 가까스로 숨긴 채 "거기 공기 참 좋더라."라고 간신히 말했다. 우리 모두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목사님 이전의 고모부는 옷가게 사장님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옷장엔 대부분 고모부가 운영했던 메이커 아동복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했던 사업들 중 기억하는 유일한 조각이다. 그곳에서만큼은 아빠의 지갑이 더 쉽게 열렸다. 정작 카드를 내미는 아빠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때였다. 엄마는 더 좋은 옷과 예쁜 옷을 고르기 위해 열을 내며 매장을 샅샅이 뒤졌고, 고모는 그런 엄마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한가운데에서 아빠의 주변에 서서 상기된 얼굴로 서있던 건 고모부의 몫이었다.
그렇게 매장을 방문할 때마다 옷을 사고 또 사고, 또 사고 난 후 더 이상 엄마의 눈에 쌍둥이에게 어울리는 옷이 보이지 않자, 아빠는 과일 상자를 사들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린 매일 일정한 지출을 해야만 했다.
그때 역시 고모부는 말을 자주 더듬었다. 빨리 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듣기에 괜찮은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수시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미안함과 씁쓸함, 머쓱한 감정을 모두 담은 말은 찾기도, 조합하기도 쉽지 않았으므로 그는 대신 입술을 두 배이상 달싹거렸다.
그때쯤이었다. 고모네를 '한숨'으로 정리한 때. 엄마가 입으라고 줬던 옷을 더 이상 입기 싫어졌을 때였고, 아빠가 멜론 두 개를 사면서 제일 큰 것을 고모부의 손에 넘기는 것이 억울해졌던 때였다.
이후 또 시간은 흘렀다.
옷가게 사장님에서 목사님이 된 고모부는 더욱 진중해졌다. 우리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말이 아닌 기도 속에 넣었고 미안함은 손을 맞잡는 것으로 표현하는 자기만의 대화법도 만들기 시작했다. 마음만큼은 이미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가령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꼭 집어 남동생의 실명을 언급해 엄마의 깍지 낀 두 손에 더욱 힘을 들어가게 했다.
엄마는 매번 감격했다. 그리고 나 역시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사춘기 때의 편견은 여전히 내려져 오고 있었는데, 정작 마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대화법은 예배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고모부는 추모식 예배가 처음이었다.
고모부는 첫 번째 기일엔 긴장을 끝까지 털어내지 못해 가족들의 한숨을 유발하게 했고, 두 번째는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실눈을 뜨는 조카들이 속출했다. 그리고 세 번째 예배는 두 가지가 모두 적용되었다. 기도 역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다양한 단어로 말하느라 힘들어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면서 앞으로 3년 역시 똑같은 말씀을 들을 것이라 단언했다.
발전과 성장은 목사님과 어울리지 않았다. 기도와 설교 말씀은 스스로 만든 대화법 이상의 열기를 뿜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느낌이 들었다. '한숨'은 또 그렇게 연장되는 듯했다.
"목사님의 설교에 엄마가 잘 몰랐던 말씀이 숨어 있었는데, 딸 너는 그걸 알고 있었니?"
"그래? 나는 사실 작년이랑 너무 똑같으시 던데..."
"아니야, 옛날보다 훨씬 좋아지신 것 같아. 그렇지?"
"맞아요 형님,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내가 간과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일찍 사위를 얻은 장인어른이었고, 작은 교회에서 목사님으로 5명 정도의 신도와 함께 살아온 사람이었다. 추모 예배를 시작하고 한없이 부족하고 또 부족했던 사위,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신 적 없던 아버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눈물을 보이셨다. 할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죄송함이 그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그 장면 역시 좋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한숨'으로 옭아맨 목사님은 여전히 큰 두 손으로 멜론을 건네받던 고모부에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온당하다고 생각했던 고모부에 대한 모든 것은 유통기한이 너무 길어 문제였고, 그 문제는 결국 나에게 되돌아왔다. 그날 나만 고모부의 기도를 답답한 마음으로 들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니 더욱 당혹스러웠다.
아이같이 코를 훌쩍이던 고모부였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짓밟아버린 것 같은, 그런 '철없는 한숨'이랄까.
눈으로 보이는 외면에, 표면에 일차원적인 접근으로 유지해 온 편견이 이렇게 나의 무의식을 점령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가 앞으로의 3년 역시 똑같은 말씀으로 할아버지를 기억하려 이유도 나중에서야 혼자 알게 됐다.
기독교 집안이란 말이 무색하게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아들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의 전도 리스트에 내가 들어있다는 것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롭게 그를 정의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아가 고모부를 통해 내가 지금까지 내린 여러 사람들에 대한 정의 역시 다시 곱씹어보는 중이다.
사실 또 어디서 정체된 채로 타인을 맞이하고 있을까 걱정이다.
27살도 곧 있음 떠나보내야 할 이때에 단순히 시간만 흘러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야말로 한숨만 나온다.
뭐든 길다고 다 좋은 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