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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Sep 24. 2019

아무리 비틀즈라지만 너무 하잖아.
영화 <예스터데이>

다양한 밑밥은 효과가 너무 정교해, 오히려 불쌍한 잭을 만들었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예스터데이
 Yesterday , 2019 제작  

영국 |  드라마 |  2019.09.18 개봉 |  12세이상관람가 |  116분 

감독: 대니 보일 


아무리 비틀즈라지만 너무 하잖아




<예스터데이>는 음악영화인가? 아님 로맨스 영화인가? 

필자는 공교롭게도 음악과 로맨스보다 주인공 '잭'의 성장영화로 보았다. 아니 기대했다. 그래서 비틀즈에게 난데없이 화가 났다. 감독이 찬양하는 비틀즈의 노래는 1분 미리 듣기의 분량도 채우지 못하고 필자의 귀를 어지럽히기만 했다. 비틀즈에 열광하던 세대가 아니란 이유로, 그래서 그들의 노래를 잘 모른다는 생각으로 '로맨스'영화로 관람하고 싶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비틀즈의 노래로 기적을 꿈꾼 '잭'에게 내려진 선고는 그저 '본래 있었던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만족해라.'뿐이다. 지각변동으로 인한 12초의 정전 효과가 본 영화의 가장 거창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는데, 그 끝도 멋지게 결론내기가 부단히 어려웠던 모양이다. 
  
비틀즈에 문외한 사람들은 없을 거란 단호한 착각은 스토리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요소가 <예스터데이>의 자부심을 세워주는 용도는 아니지 않은가? 12초 정전 후 앞니 두 개를 잃고 선물 받은 기타로 '예스터데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비틀즈를 향한 찬양은 끝냈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에드 시런의 보조 가수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앨범을 만들 때 자연스럽게 비틀즈의 볼륨을 줄였어야 했다. 
작품의 주인공은 비틀즈가 아닌 가난한 뮤지션 '잭'이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예스터데이> 스틸컷

잭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하지만 현재는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소꿉친구 엘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매일 무대에서 노래하는 뮤지션이다. 다만 좀 더 가난하고, 가수란 이름의 효과가 선생님이란 이름을 가졌을 때보다 훨씬 미미하다는 것뿐이다. 

누구에게나 선택의 순간은 찾아온다. 잭은 자신이 꿈꾸던 '래티튜드 페스티벌'에 가수로 노래할 수 있는 행복한 기회를 갖게 된다. 사랑스러운 매니저 엘리가 사방팔방 뛰어다닌 덕이다. 하지만 그는 작은 천막, 10명도 채 안 되는 관객 앞에서 노래를 열창한 후 깨닫는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암묵적인 체념이 기타를 내려놓게 한다. 잭을 사랑하던 엘리는 그를 또다시 만류한다. 그의 재능보다도 노력이 줄 값진 성과가 분명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잭의 밴드 무대를 보고 반한 엘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잭에게서 또다시 그때의 모습이 나타도록 도와주는 것이니까.   

"기적은 없어."라고 단언한 그는 위대한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고, 아주 잠깐 동안 고뇌한다. "비틀즈는 못 돼도 기립박수는 받아봤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해왔던 그였다. 그런데 이젠 기립박수가 아니라 비틀즈가 될 수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기회가 아닌가. 
잭은 그날 밤 미친 듯이 비틀즈의 노래를 받아쓰기한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강한 믿음과 진실이 밝혀질 일이 없고, 그렇기에 죄로 단죄받을 일도 없는 완벽한 비밀이 그에게 잘못된 면죄부를 주면서 <예스터데이>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명곡은 시대를 탓하지 않기에 잭은 단숨에 성공한 뮤지션의 길에 올라선다. 먼지바람이 불던 무대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던 그는 세계적인 가수 에드 시런의 명성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비틀즈의 노래가 준 달콤한 인기의 맛은 잭을 시간이 지날수록 흥분시킨다. 

출처: 영화 <예스터데이> 스틸컷

'잭은 언제까지 비틀즈의 음악으로 사기를 칠까?'란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난데없이 엘리의 사랑고백이 튀어나온다. 유명 뮤지션 잭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주체가 '양심'에서 '사랑'으로 변하자 <예스터데이>의 주제 역시 급커브를 시전한다. 마치 반전을 꾀한 것처럼 말이다.

잭은 자신의 양심을 지키면서 사랑도 되찾을 수 있을까?

'양심'과 '사랑'을 융합한 영화가 내민 질문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전혀 흥미롭지 않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잭의 성장 스토리에 사랑스러운 연인을 등장시키는 것은 감독의 묘수였을 것이다.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더 풍부하게 할 거란 생각이 그의 감정을 지배했겠지. 다들 눈치챘겠지만, 이 질문의 답은 너무나 예측하기 쉽다. 그게 <예스터데이>가 간과한 가장 큰 문제다.
 

잭은 자신이 실제로 작곡한 '여름 노래'를 비틀즈의 노래에 살짝 끼워 넣고 앨범을 발매하려 했지만, 단번에 프로듀서에게 잘린다. 성공을 위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쉽게 버려버린다. 엘리의 마음을 내내 눈치채지 못한 것도 비틀즈란 잘 포장된 길에서 발견하기 위해 때를 미뤄온 것뿐이다. 
죄를 짓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에 점차 지쳐가는 잭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신의 곁에 있어줬던 엘리를 더 간절히 원하기 시작한다. 이미 애인이 생긴 엘리였으나,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비틀즈를 아는 2명의 관객이 그를 더 공포스럽게 하고 만다. 자, 이제 잭은 다시 선택해야 한다. 
답은 정해져 있다. 모두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가 아님을 발표하고, 엘리에게 그동안의 무지했던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며 열렬히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된다. 그럼 <예스터데이>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결말을 품고 끝낼 수 있다.

출처: 영화 <예스터데이> 스틸컷

 감독은 앞선 공식을 그대로 이행한다. 그런데 도중에 잠깐 공식을 약간 꼰다. 비틀즈의 존재를 아는 2명의 관객에게 '음치'란 설정을 부여해 잭에게 명곡을 대신 불러줘 너무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또 엘리의 애인에게서 다른 여자를 붙여놓고 바람을 피기 직전인 잭과 엘리에게 윤리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거라 생각하고 싶겠지만, 결국 정해진 결말의 시시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쓴 단순한 수다.

비틀즈의 멤버 존을 만난 장면 역시 감동적인 이야기의 끝을 수놓기 위한 발판이었다. 존은 성공했냐고 물어보는 잭의 물음에 단호하게 조언한다.  

"행복하다고 했잖아. 그럼 성공한 거지. 어려울 거 없어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모두에게 말해."

그렇게 영화는 해피엔딩을 그린다. 잭은 에드 시런의 콘서트에서 자신의 거짓말을 털어놓고 엘리에게 고백한다. 엘리는 잭과 자신을 이해한다는 애인의 말에 고마움을 느끼며 오랜 짝사랑을 끝낸다. 둘은 가정을 이루고 여전히 노래하며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출처: 영화 <예스터데이> 스틸컷

사실 <예스터데이>는 '남들한테 인정받지는 못해도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삶은 없다'는 진리를 유쾌하게 전달하는 영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영화라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는 '비틀즈를 찬양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란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낀다.   
처음부터 잭의 목표가 인정받는 뮤지션이었을까? 그는 재능은 노력을 이기지 못한다는 명제에 희망과 열정을 부여했던 꿈 꾸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잭은 점차 지쳐갔고, 자신감을 잃어갔다. 가난한 뮤지션이어도 행복한 삶을 살 거란 신념도 사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12초의 기적은 잭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했다. 
비틀즈의 노래를 훔친 잭은 오히려 찬양받았고, 그를 표현할 노래는 빛을 잃어버렸다. 
잭에게도 비틀즈에게도 엘리에게도 영화는 '비극'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비극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격한 감동을 느끼길 바라고 있는 셈이다. 꼭 비극이 필요하냐는 의문이 따라오겠지만, 제대로 된 반전 효과도 보여주지 못한 <예스터데이>에게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뻔한 스토리와 영화 중심을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뻔한 끝을 치장하기 위해 깐 어려 밑밥들은 오히려 주인공 잭을 불쌍하게 만들고 만다. 
분명 행복하게 기타를 치며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을 보고 영화관을 나왔는데, 뭔가가 잘못된 느낌이다. 완벽한 결말을 봤으니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는 강요를 받고 있다랄까.  처음엔 기울어진 고갯짓이 그동안 수없이 나온 비틀즈를 소재로 한 영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존이 말한 행복론이 이 답답함을 틀어막은 원인이었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결국 <예스터데이>는 그저 비틀즈 때문에 만든 작품이다. 그 이상은 전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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