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6. 제우스가 쏘아 올린 화살
단상#16. 늙은 가수에서 시작되었다
음악프로, '복면가왕'에 제우스가 등장했다.
1라운드에 탈락해 2라운드에서 부를 예정인 노래를 부르기 직전이었다.
누구도 그의 정체를 가늠하지 못했다. 정체 찾기에 혈안이었던 나는 물론이고 아무렴 노래만 좋으면 되는 아빠도 몰랐다. 패배를 기다리는 제우스. 그는 이미 상대에게 승기를 빼앗긴 후였다. 그러나 연예인 패널들에 의해 또다시 시청자는 긴 기다림을 견뎌야 했다. 그들의 토크는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어쩜 저렇게 쓸데없이 말이 길까 싶다가도 다채롭게 구사하는 새삼 감상평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나 결과는 탈락.
탈락한 제우스가 정체를 공개하기 위해 무대 위에 다시 섰다.
그는 김완선의 히트곡인 '리듬을 춰줘요'를 선곡했다.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오고 멋진 액션을 취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제우스, 역시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젊은 가수는 절대 아니야, 아빠. 늙은 가수 같아 그렇지?"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가 순식간에 매워졌다.
'리듬을 춰줘요'에 위로나 감동을 받을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나는 울컥하는 중이었다.
제우스는 가면을 멋지게 벗어던졌다.
백두산 김도균이었다. 역시 난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가 기타를 메는 순간 관객들이 환호성을 터뜨렸고, 연예인 패널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또 형식적이네. 지겹지도 않나?)
그때, 체크무늬 셔츠 잠옷을 입은 채 어깨를 들썩거리는 아빠가 보였다.
마치 제우스와 한 몸이었던 것처럼, 아빠는 앉은 채로 상체를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늙은 가수의 노래와 퍼포먼스에 그는 젊음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의 등짝에서 청년의 웃음이 보았다.
노래방에서 볼록 나온 배에 마이크를 걸치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굵게 뽑아대던 그가 아니라,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타를 치며 친구들과 소리를 빽빽 지르던 그의 과거 모습이 그려졌다.
한때 가수를 꿈꿨던, 까무잡잡한 얼굴에 잠자리 안경을 쓴 청년.
그에게도 그런 젊음이 있었는데.
아니 그는 늙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멋대로 늙음이라 정의한 것이지.
그러고 보니 나는 종종 그에게 젊음을 투정하고 있었다.
그때 시대와 지금 시대가 다르다는 말을 시작으로 아무렇지 않게 세대 차이를 거론했다.
중요한 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까지 이해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웃어넘겼다. 아무렇지도 않듯이.
"자식은 늘 아홉을 뺏고도 하나를 더 달라고 조르는데 부모는 열을 주고도 하나가 더 없는 게 가슴 아프다."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중.
그 와중에 생뚱맞게 <동백꽃 필 무렵> 명대사가 생각났으니, 어떻게 코끝이 찡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여, "백두산! 기타리스트 알지 아빠는!"란 말에 "에이 나는 별로네!"라 얘기하고도 남은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대신 한숨이 푹 나왔는데, 왜 숨기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난 다시 또 무심코 젊음을 정의하고 말 것이다. 그러고도 남는다.
무심하게, 또 무심하게, 때론 무안하게.
그렇게 말을 툭툭 던지면서,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또 보고야 말겠지.
바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