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온라인상영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 110분
Window Boy Would Also Like to Have a Submarine(2020)
감독: 알렉스 피페르노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네덜란드, 필리핀
코미디/판타지/로맨스/멜로)
고독에 묻힌 소년, <잠수함을 갖고 싶은 소년>
영화<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 공식포스터유람선 안에서 먹고 자면서, 청소부로 일하는 소년.
그에게 허락된 공간은 작은 침대가 놓인 방 하나뿐이고, 손에 가질 수 있는 건 청소 도구인 긴 호스와 걸레뿐이다. 입는 옷도 작업복 밖에 없다.
일을 하러 왔으니 이런 공간과 환경은 당연한 처사이지만,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무료함에 빠져있다.
<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은 '국제경쟁' 부문에서도 가장 궁금증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제목에 드러나는 '잠수함'이 무엇을 의미하고, 소년이 경험하게 되는 비밀스런 공간들의 연결성이 궁금했다.
철학적인 메시지가 제목과 포스터에서부터 느껴진 덕에 고민 없이 첫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영화로 선택했다. 홀로 깊은 바닷속을 탐험한 기분이랄까.
소년의 직업은 청소부, 유람선에서 승객들과는 철저하게 분리된 채로 일을 하고 있다. 승객들이 잠을 잘 때 일어나, 어둠 속에서 유람선 곳곳을 걸레로, 솔로, 호스로 열심히 닦는다. 그러나 표정은 잔뜩 지루하다. 할 수 있는 일이 청소뿐인데, 즐겁지도 재미있지도 않고 심지어 보람까지 없으니 말 그대로 죽지 못해하고 있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한번 이상 느낀다는 고독함과 지루함이 소년에게도 찾아오고 만 것이다.
그런데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 한번 출항한 유람선이 육지에 닿아 멈출 때까지 소년은 갇혀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도 없다. 제 몸 하나 누일 공간마저 없으면 그는 완전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신이 주신 은혜였을까? 강렬하고도 신선한 자극이 필요했던 소년은 운명적으로 비밀의 문을 발견한다. 몰래 유람선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삶의 무료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던 그는 '승무원 외 출입금지'라 쓰여 있는 문을 열고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유람선에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 줄이야, 소년이 갖고 싶어 했던 잠수함의 존재가 바로 그 문이었을까?
소년이 문을 열고 들어간 세상은 몬테비데오 도시에서 혼자 사는 여성의 집, 화장실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람선의 생활이 지겨울 때면 어김없이 여자의 집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음도 몸도 지쳐버린 자기를 위한 방법이라 스스로 정당화한 결과였다. 화장실에서 목욕하는 여성의 소리를 숨죽인 채 듣고, 그녀가 밥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심지어 잠을 자는 모습까지 전부 집 안에서 몰래 훔쳐보는 소년. 나아가 그녀가 아침에 일을 나가면 당당하게 들어가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샤워까지 하고 나온다. 누가 봐도 범죄소년인데, 조용히 여자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을 몰래 공유하면서 삶의 고독함을 이겨내는 그만 보인다. 그 누구도 소년의 기이하고도 소름 끼치는 행위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마치 그게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열심히 묘사할 뿐이다.
출처: 영화<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 스틸컷이런 황당하고도, 허무맹랑한 두 공간의 연결성은 사실 영화 시작부터 대놓고 보여주면서 정당성을 확보했다. 정확히 말하면, 서로 연결된 공간이 내뿜어내는 신비로움과 묘한 불안감을 소년보다 관객이 먼저 느꼈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 경악을 하면서도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첫 시작은 이렇다.
어둡고 침침한 숲에서 작은 랜턴을 머리에 낀 남자가 등장한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면서 그가 천천히 무언가를 바라보는데, 아주 두려워한다. 그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존재 혹은 어떤 것'을 봤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남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헛간'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마을에 살면서 이런 헛간은 처음 봤기 때문인데, 다른 이들 역시 갑자기 세워진 나무집에 극심한 두려움을 표출한다. '헛간'은 순식간의 마을의 골칫덩어리가 된다. 저주를 품었다는 말부터, 헛간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곧이어 이 마을에 재앙을 가져올 거란 확신까지 한다.
일사천리로 필리핀 한 마을에 생긴 '헛간'의 존재를 신이 내린 '재앙'과 '저주'로 규정한 것이다.
헛간을 처음 발견한 놀리는 다음날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집 밖 계단에서 친구의 의해 잠에서 깨어난다. 집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헛간을 본 후에 꾼 꿈 때문이었고, 그 꿈은 절망만 가득했다. 뱀이 나타나 아내와 딸을 잡아먹는 꿈. 헛간과 집이 연결되어 거대한 뱀이 나왔다는 그의 생생한 이야기는 곧 마을 사람들에게도 막연한 공포로 자리 잡는다. 놀리의 말에 의하면, 헛간에서 뱀이 나와 마을을 파괴할 일이 미래에 일어날 거라 했다.
이후에 등장하는 소년이 타고 있는 유람선과 연결된 여자의 집의 상황을 보면, 놀리가 발견한 '헛간' 역시 유람선과 연결된 또 다른 공간임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저 아직 소년의 손에 의해 문이 열리지 않은 것뿐이다.
출처: 영화<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 스틸컷나 역시 방문을 열면 다른 세계가 펼쳐지길 고대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차근차근 쌓아 올린 벽들을 부술 수가 없어, 아주 잠깐만 다른 곳에 놀러 갈 수 있기를 말이다. 마법을 부려 새로운 세상에 도착해 온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희열과 즐거움을 누가 마다할까. 오로지 기쁨과 행복만 존재할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를 꿈꾸는 자의 '환상'은 두려움 혹은 공포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고유의 감정이니까.
상상력으로 만든 환상의 나라로 떠나고 싶은 강한 열망은 보통 '여행'이란 현실적인 대안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것이 한계이자 최고의 방법이니, 직접 발품 팔아 가야 한다. 그러나 이 소년은 정말 특별하다. 그에겐 이미 환상의 나라로 향할 문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러니 굳이 힘을 들여 떠날 필요가 있을까?
자, 그 문을 마주한 사람이 소년이 아닌 '나'라면, 이 유람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나라면?
이거야 말로 난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여자에게서, 놀리에게서 또다시 반복되어 노출된다. (난 쉽게 대답하고 행동할 수 없게 하는 이 문제가 영화 내내 나에게 심한 압박감을 줬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다.)
하여, <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에서 부리는 마법은 어딘가 초초하고, 애잔하며 동시에 통찰적이다.
유람선에 사는 소년의 행위는 범죄와 다를 바가 없지만 조용히 흐르는 물처럼 잔잔하고 안정적이다. 반면, 필리핀 마을 사람들은 헛간의 출현으로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헛간 주위에 모여 조상신께 제사를 올리고 답신이 올 때까지 계속 제사를 반복한다. 수많은 닭과 돼지를 죽여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은 답을 하지 않는다. 동시에 소년은 여성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젠 아주 대놓고 여자의 집을 공유하려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경찰에 신고하고 집을 옮기겠지만, 이 여성은 좀 다르다. 자신의 집에 낯선 남자가 들어와 사는 데도 여성은 그를 받아들인다. 왜일까? 겉으로 보면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또 우리가 소년을 바라보는 마음과 같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 보낼 주변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이는 곧 심각한 우울증과 고독함을 불러냈다. 그래서 그녀는 소년을 보자마자 공포보다 반가움을 느끼고 만다. 소년에게 옷을 주고, 일자리까지 구해주는 여자.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은 서로에게서 각자의 결핍을 채운다. 여자 역시 문을 통해 유람선을 탐험했다. 이제 그들은 완전히 한 배를 탔다.
그릇된 방법으로 시작한 그들의 관계가 뛰어난 실효성을 발휘하는 순간, <잠수함을 갖고 싶은 소년>은 그 작품만의 색깔을 보여준다. 누군가 생각만으로 밤을 지새울 때, 이 작품은 직접 행동하게 함으로써 또 스스로 그 선을 넘게 함으로써, 그다음에 일어날 사건을 온전히 그의 몫으로 남겨둔다. 마치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명확한 진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년은 그것을 깨닫는 데, 단 요만큼의 힘도 들이지 않는다.
출처: 영화<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 스틸컷필리핀 마을의 사람들은 답을 주지 않는 조상신을 원망하지 못한다. 그저 계속 기다릴 뿐이다. 그런 현실에 놀리는 또다시 뱀이 나오는 꿈을 꾸게 되고, 결국 아무도 없을 때 헛간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반드시 위험으로부터 지켜야 할 가족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유람선 내부로 더 깊게 발을 들인다. 그리고 유람선 한가운데에서 소년을 만난다. 놀리는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소년의 눈에는 다른 호기심과 열망이 깃들고 만다.
소년은 놀리의 말을 무시한 채 그가 들어온 문으로 향하고, 역시나 거침없이 문을 연다.
그러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마을 사람들은 매일 같이 이상한 굉음을 내뿜는 헛간을 파괴하자는 결정을 내린 상태. 소년이 문을 열고 창문으로 마을 사람들을 보기도 전에, 휙 폭탄이 날이 온다. 순식간에 날아온 폭탄은 그 자리에서 터지고, 헛간은 완전히 파괴된다. 가까스로 도망친 소년의 위로 물이 쏟아지고, 이내 유람선은 깊은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만다. 놀리가 집으로 돌아갔는지, 소년이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자의 집 화장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양이 늘어갈수록, 우린 그녀의 집이 금세 침수될 것이라 예상하며 두 사람의 결말 역시 비극적으로 끝날 것임을 깨닫는다.
유람선을 침몰하게 만든 자는 누구인가. 소년이라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소년은 자신이 속할 수 없는 공간(승무원 전용)을 들어가 여자를 만났고, 그녀의 동의 하에 함께 두 세계를 오가며 살았을 뿐이다. 그럼 필리핀 마을 사람들 때문인가? 그들 역시 자신의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썼을 뿐이다. 뚜렷하게 대상을 정해 그에게 책임전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작품의 이면엔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탐구하고 이해하길 바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출처: 영화<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 스틸컷<잠수함이 갖고 싶은 소년>은 인간의 복잡하고도 혼란스러운 내면을 영화적 요소를 활용해 더 잘 보여주는 힘이 있다. 대표적으로 카메라 앵글은 사람이 중심이 아닌, 환경(배경)이 중심이다. 사람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가 먼저고, 그다음이 인물이다. 따라서 카메라는 가만히 있는데, 인물들이 이동하는 장면이 많다. 그 장면에서 우린 대부분 인간의 무기력함을 더 처절하게 느낀다. 또한 영화의 색감이 전부 어둡고 칙칙하다. 짙은 블루 계열이 깔린 화면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심리적으로 답답함이나 불편함을 호소한다. 바다를 유랑하는 소년의 갑갑한 현실을 보며, 숨 막히는 어둠 속 바다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결국 소년이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끊지 못하는 것처럼, 관객 역시 이 영화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 점에서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이다.
소년이 갖고 싶어 하던 잠수함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즐길 수 있는 그런 공간.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서 봤듯이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만 딱 맞춰진 장소도 나아가 자신을 완벽하게 캐어해 줄 타인도 없다.
그런 공간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존재한다.
그런 사람 역시 나의 외면이 아닌 나의 내면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우린 소년에게 떨어진 행운의 문도 없을뿐더러,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때까지 살아있을 확률도 없다. 그래서 가정을 하고, 상상을 발휘하며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마저도 결국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깊은 실망감을 선물한다. 간혹 후련함과 통쾌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건 드문 일이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갖고 싶은' 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삶. 우린 포기하고 놓아버리는 순간 내면에 숨어있던 어둠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소년이 문을 열고 타인의 공간에 침범한 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이로서 확실해진 것이 있다. 침몰한 유람선의 모습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던 현실처럼, '영영 가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끝까지 살아남아, 나와 죽을 때까지 싸울 적은 오로지 '고독' 뿐이란 사실.
우리가 소년과 여성, 그리고 놀리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낀 건, 너무나 당연한 공감이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