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각자의 인생이다, 상관말아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각의 여름(2020)
Midsummer Madness 82min
감독: 김종재
무척이나 쿨해 보였으니 성공, <생각의 여름>
29살 주현실, 그녀의 반려견 이름은 호구다. 딱 듣는 순간 감이 잡히지 않은가?
그렇다 그녀는 현실에서 '호구'로 살고 있는 '흔한' 청춘이다.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신춘문예를 비롯해 다양한 문예지에 등단을 꿈꾸는 시인 지망생이다. <생각의 여름> 속 현실의 목적은 딱 하나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공모전에 낼 시를 5편 채워 내는 것. 이제 딱 한 편 남았다. 그런데 마지막 한 편이 도저히 안 나온다. 하루 종일 바닥을 쓸고 닦고, 씻고, 호구와 함께 산책을 해도 시를 쓰기 위한 '그분'은 오시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한다는 '그분!' 오신 날. 그날에 바쁘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은 내 손가락이 아니다. 마치 마법사가 왔다 간 것 같기도 하고, 뭘 하지도 않았는데 뿌듯하기도 하며, 심지어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분이 오신 날 쓴 글을 읽으며, 경탄하고 감탄하는 '나'만 있을 뿐.
그러나 공모전 마감을 하루 앞둔 현실의 '현실'에는 오지 않으신다. <생각의 여름>은 그런 현실의 조급한 마음을 풀어주고, 그녀가 감췄던 문제를 하나씩 혼자 해결해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그녀가 쓴 4편의 시가 현실과 관계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독백의 형태로 전해진 다는 점이다. 마지막 5번째 시가 누구의 의해 읽히게 되는지가 <생각의 여름>이 주는 소소한 관람 포인트이라 할 수 있다.
호구와 아침 산책길에 오른 현실은 자신에게 관심을 던지는 남자를 만난다. 호구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척, 현실의 이름을 물어보고 인스타 아이디까지 받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남자에게 대시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분명 그녀에게 있다.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치약이 떨어진 빈 칫솔로 양치하는 현실의 삶의 태도에는 귀차니즘과 무기력증이 버무려져 있다.
먼저, 그녀는 전 남자 친구 민구를 잊지 못했다. 놀이터에서 상황극을 하며 달달하게 연애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집에 쌓여있는 인형들을 보며 인형 뽑기 실력자였던 민구를 떠올리고, 그가 자기의 집에 버리고 간 물건들을 보며, 또다시 자학한다. 자신 역시 민구가 버리고 갔다 말하면서, 자기의 집에서 스스로를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속절없이 민구가 보고 싶다. 그가 그립다. 현실은 이별 길에 올라 도착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보통의 여자였다. 그리고, 여전히 시 한 편을 못 쓴 시인 지망생이다.
"시가 산으로 갈 땐, 산으로 가는 게 답이다!"
현실은 시가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한 상황을 탈출하고자 무작정 산행을 시작한다. 이미 그녀는 같은 과 선배와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당한 후, 홀로 라면을 먹었다. 공원에 앉아 아이스크림으로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는데, 마치 산행을 위한 복선인 것처럼 땅바닥에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린다. 자, 이렇게까지 해서 현실이 산행에 오른 이유는 뭘까. 시는 도대체 언제 쓰겠단 걸까.
<생각의 여름>이 유독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노트북 앞에 앉아서 글을 바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지망생들의 소원임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고 멍 때리며 한글 빈문서를 보고 있는 암울한 환경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알고 있다. 현실이 갑자기 산을 올라가는 건 글 쓰는 지망생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다음 스텝이다. 환경의 변화가 주는 힘은 정말 대단하니까. 어떤 인연을 만날지 모르고,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 중요한 건 뭐든 날것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이 자신의 베프였던 주영이를 산에서 만난 것처럼.
주영은 현실에게 자살시도를 하게 한 결정적 인물이다. 남자 친구(원창)와 바람을 핀 가장 친한 친구 주영과 연을 끊어버렸던 현실. 그녀는 주영과의 만남에서 세상 쿨한 척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시작으로 아슬아슬하게 대화를 하는 두 여자. 하필 주영은 등단을 한 시인이었고, 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한 여자였다.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현실이 택한 자세는 주영의 시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 별로였다는 말과 오랜만에 만난 인연이니 사진을 찍자고 한 일이었다. 이 얼마나 환장할 조합인가. 심지어 인스타에 올리겠다고 찍은 사진은 핸드폰 번호도 교류하지 않은 주영의 폰에 들어있다. 그제야 현실은 주영에게서, 그 끔찍한 상황에서 도망친다.
현실의 첫 번째 시, '실존하는 기쁨'은 그렇게 관객의 심사대 위에 올라선다.
주영의 시선으로 쓰인 시는 원창과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현실로부터 들켜버린 그날로 돌아가게 한다. 친구의 충격 먹은 얼굴을 보며 모른 척했던 주영의 마음과 자꾸 남자 친구인척을 하며 주영의 얼굴을 만지는 원창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보여진다. 마치 주영의 독백처럼 보이지만, 명백하게 현실이 쓴 시다.
아니, 죽겠다고 다짐하고 쓴 유서였다. 이후 유서가 '실존하는 기쁨'이란 시가 된 것이다.
<생각의 여름>은 이렇게 시 한 편당 한 사람을 등장시켜 현실과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인물이 현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시 한 편으로 설명한다. 시 제목이 화면 위로 등장할 때마다 본의 아니게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너무나 쉽게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내 이야기로 들리는 착각을 경험하면서 함께 말이다.
주영을 만난 후 감정을 쉽게 정리하지 못한 현실은 같은 과 동기(남희)와 낮술판을 벌인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 했던 남희의 현 직업은 영화 스텝, 독립영화 제작 스텝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내가 또 영화하지? 그럼 개다! 시바견!"이라 울부짖지만, 현실은 딱 잘라 말한다. "아 재미없는 독립영화 같다!"라고. 그들의 대화는 이미 수십 번 반복된 술주정 중 하나일 뿐이다. 6년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서 청첩장을 받은 남희. 그는 술을 잔뜩 먹고 여자 친구였던 그녀에게 전화해, 당당하게 돈이 없으니 축의금으로 먼저 3만 원을 주고 그다음에 2만 원을 추가로 주겠다고 선언한다. 그의 극강의 지질함은 민구를 잊지 못하는 현실과 다를 바 없지만, 현실은 남희를 재미없는 독립영화라 치부한다.
두 번째 시, '오수'의 화자는 남희. 그는 술의 힘을 빌려, 마지막 사랑인 여자 친구를 떠올린다.
사랑스러운 개를 여자 친구로 빗대며 그녀와 깨져야만 했던 아픈 과거를 담담히 고백한다.
남희를 만나도 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길, 현실은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점심 약속을 지키지 않은 과 선배. 그 역시 대단한 사연(오래 사귀었던 연인과 헤어진 후로 깊은 슬픔에 빠져있는)이 있어 보인다. 현실은 그를 보며 또다시 민구를 생각한다. 선배에게 시를 보여주며 자문을 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무리 과거에 그녀가 얽매여 있어도, 현실은 반드시 시를 써서 공모전에 제출해야 하니까.
선배의 조언은 '시와 나를 분리하는 것'. 시에서 멀리 떨어져 관조적인 태도로 시를 쓰는 게 좋겠다는 그의 첨언에 현실은 곰곰이 고민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가 없는 인물이다. '실존하는 기쁨'도 '오수'를 보면 이미 답은 나와있다. 갑자기 마지막 시에 자신의 시선을 모조리 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그렇게 술을 먹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현실의 '그분'은 여전히 소식이 없다.
절망스러운 마음을 품고 도착한 카페. 현실은 그곳에서 일하는 알바생이지만, 일하는 타임이 아닐 땐 프로 손님일 뿐이다. 그녀를 반기는 다른 알바생, 유정. 그녀는 오래전부터 현실을 동경해왔다. 현실이 알바를 끝내고 카페에서 나갔다가, 딱 3초 후 다시 들어와 노트북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 모습을 매일 같이 봐왔다. 하루에 두 번 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용기를 내 현실에게 다가가는 유정.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현실의 관심에 드는 걸 성공하지만, 사실 그녀가 아는 건 '삼행시'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유정이 귀엽기만 하다. 자신을 유일하게 치켜세워주는 어린 유정. 내심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유정에게 세 번째 시, '현장'을 보여준다.
'현장'은 유정이 현실을 카페에서 관찰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현실을 귀여운 강아지로 표현하는 유정의 장난스러운 시선이 가득 봄햇살처럼 들어가 있다.
"민구를 만나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시가 완성될 것 같다."
네 번째 시 '무화과 숲'은 드디어 민구에게로 넘어간다. 누가 뽑았는지 모르는 꼬부기 인형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현실은, 인형을 민구에게 주기로 마음먹는다. 그의 물건도, 자신의 추억도 함부로 버릴 수 없었기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신원불명(?)의 꼬부기 인형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민구는 힘들어하는 현실에 능글맞게 말한다. 그녀의 '무화과 숲'을 읽고 "이제 좀 시인 같은데?"라던지, "슬퍼도 슬퍼하지 않는 뭔가 더 시적인 표현이 있네."라고 툭툭 던지며 이별을 공고히 한다.
현실이 다시 자신에게 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민구 역시 매일 같이 놀이터로 출근해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안다. 그렇게 탄생한 시가 바로 '무화과 숲'이니까. 시를 통해 민구는 현실을 잊기 위해 깨어있을 땐 일을 하고 밤에는 놀이터를 찾아가 현실을 만나 사랑하는 꿈을 꾼다.('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스스로에게 말하는 그의 독백은 '무화과 숲'의 마지막 시 구절이다.)
현실의 아픔은 온통 주위 사람들의 관계와 얽혀있었다.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가고 싶은 마음에 피를 토하며 시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민구를 만나 모든 감정을 정리하는 데 성공한다. 그동안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내면서 완전한 이별 기차에 탑승한다. 고통스럽기만 했던 헤어짐을 기록해버린 여름은 이제 현실의 계절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마지막 다섯 번째 시를 웃으며 완성했으니까.
현실은 하루 동안 만난 사람들을 깨끗이 정리한다.
민구는 이제 자신의 삶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고, 유정이는 여전히 귀엽다. 남희는 마지막 사랑에 벗어나지 못하는 재미없는 독립영화고, 주영은 이제 생각할 필요 없는 모름의 인간이다. 하여, 온전히 자신만 남은 현실은 다섯 번째 시, '소실'을 직접 읽으면서 따스한 햇볕을 받는다.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여름이 잊고 싶은 과거와 함께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 남은 일은 시 5편을 우체통에 넣는 일. 현실은 아침을 상쾌하게 맞이하며 자신의 도전을 이어간다.
그녀의 호구는 우리가 잘 아는 '호구'의 의미가 아닌 사랑스러운 반려견의 이름으로만 남아 평생 가겠지.
시와 나를 분리해서 써야 한다는 선배의 조언이 현실에게 전혀 맞지 않았던 이유는 누구에게나 각자의 감정의 숲으로 깊이 들어가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자신의 현실과 분리하지 않고 시를 썼기에 하루하루를 살 수 있었다. 그것이 현실만의 애도기간이자, 상처를 치유하는 긴 과정이었다. 또한 현실의 예술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분의 방문 역시 알아서 할 몫이다.
그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나의 태도와 감정 컨트롤은 '내가' 해아 한다.
<생각의 여름>을 보는 내내, "술도 못 마시는데 시를 어떻게 써?"라고 말하던 교수가 생각났다. "여기 분위기 좋네, 뭐 시 써 봐. 딱 앉으면 나오는 게 시 아닌가?"라고 씨부리던 사촌도 떠올랐다. A는 술을 마시면서, B는 커피를 마시면서, C는 운동을 하면서, D는 가끔 미친 척하며 수다를 떨면서 각자의 결핍을 마주한다. 그게 바로 감정을 가진 인간들의 생을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예술의 시작점이 행복보다 불행에 더 가까운 이유도 다 거기에 있다.
<생각의 여름>은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정의내릴 수 없는 예술과 삶의 무기력함,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의 아픔을 현실의 가장 개인적인 입장에서 세밀하게 표현한 점이 특별했다. 곳곳에 들어가는 현실의 독백이 오히려 시처럼 느껴졌고, 툭툭 튀어나오는 애드리브 같은 배우들의 호흡도 재미있었다. 장면 장면을 채우는 인물들의 발랄한 표정과 행동은 더 영화를 생동감 있게 했다. 기분 좋은 해피엔딩 역시 좋은 인상을 남겼다. 요즘 청춘은 마냥 좌절스럽고 힘들기만 할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 준 느낌이랄까.
하지만 무엇보다 <생각의 여름>이 지금까지 계속 기억나는 건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민구와 현실은 완전히 헤어지면서 딱 한 가지를 약속했다. 길에서 유연히 만나면, 한 사람이 무조건 도망가는 것. 그게 진짜 쿨한 거라고 그들은 열심히 정당화하며 합의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장면에서 현실은 횡단보도에서 민구와 만난다. 같은 방향에서 일렬로 서있던 두 사람은 직접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니라서 사실 모르고 함께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었다. 허나, 횡단보도 초록불이 켜지자 그들은 미친 듯이 반대방향으로 뛰어간다.
이미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보지도 않고 풍기는 분위기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럴 땐 꼭 없던 눈치와 촉이 생기는 법. 헤어진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완벽하게 쿨하게 보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달렸다!
웃음이 절로 났다.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웃픔이 성장을 위한 또 하나의 발판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녀의 코믹함과 진중함을 넘나드는 현실이 딱히 나와 달라보이지 않아 그런 걸까?
뭐, 누가 뭐래도 그 뜀박질은 나에게도 아주 쿨해 보였으니 다음에도 그들은 성공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