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란 Oct 22. 2017

"그로 인해 그 시간들은
덜 외로운 시간이었다"

<The End of tne Tour > 우린 모두 각각의 '나'일 뿐.

<The End of the Tour>(2015) /  감독: 제임스 폰솔트 / 미국 / 드라마 / 106분



  "그로 인해 그 시간들은 덜 외로운 시간이었다." 



  <The End of the Tour>는 데이빗 립스키가 데이빗 포스터 윌리스의 자살소식을 듣고, 1996년 자신이 녹음한 그와의 인터뷰 테이프를 틀면서 시작된다.


  사실 인터뷰 테이프를 다시 돌리는 립스키의 표정에서 이미 그들의 5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복잡했던 5일. 그 짧았던 5일 속엔 부러움과 질투, 이해가 뒤섞인 채 좀처럼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했던 립스키의 단면이 존재하고 있었다. 


  윌리스의 책에 감명을 받은 립스키는 그의 숨겨진 내면을 파헤치기 위해 북투어를 함께 한다. 립스키는 윌리스의 북투어를 동행한 가장 큰 이유를 그의 책이 준 감동 때문이라 했지만, 관객들은 이미 그의 눈에서 의심과 질투를 발견한다. 립스키의 모든 질문의 끝이 윌리스의 내면을 뒤집어 까기 위한 제스처와 억양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리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언어로 립스키와 끊임없이 대화하려 한다.

 

  그래서 <The End of the Tour>엔  들리고 보이는 것의 아래, 즉 숨겨진 심층이 존재한다.  두 사람의 무한한 대화량에 질려 상영관을 나가버리거나 아예 잠을 자버리고 마는 관객의 행위에 어떠한 의문도 들지 않았다면, 아마 나의 의견과 전적으로 같기 때문일 것이다.  

  5일 동안 팽팽한 줄다리기로 서로를 탐색하기만 하는 그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영화관을 나왔다면, 더더욱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 눈꺼풀 역시 몇 번이고 내려앉았었다.

 

  <The End of the Tour>은 보는 내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친절하게 다시 보여주며 이해시켜주지 않는다. 관객들이 영화의 끝에 가서야 집중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솔직히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도 영화의 평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관객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립스키의 언어엔 잔뜩 가시가 돋아있다. 쉽게 성공한 윌리스에 대한 질투가 가득하다. 아마 그의 머리와 가슴은 온통 '왜'에 짓눌려 있었을 것이다.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를 윌리스에게서 찾으려고 안달 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윌리스가 이룬 명성의 숨겨진 (대단한) 이유를 찾고자 한다. 립스키에게 그것 말고는 중요한 물음이 없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The End of the Tour> 중


   누군가를 질투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결국 자신과 그 대상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요점은 그다음에 취하는 행동과 마음가짐이다. 따라서 어떤 이는 자신을 뛰어넘어 성장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혼자 정체되어 나아갈 수 없게 된다.   

  5일 동안 립스키는 윌리스가 다양한 인간 중 그저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유일하고도 단일한 윌리스란 인간을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풀어야 할 문제로 설정한 채 고집스럽게 탐구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이 스토리엔 극적인 반전을 위한 사건이 전혀 없다. 나와 함께 이 영화를 본 친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메시지나, 주제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오히려 주제가 있는 게 더 이상할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친구의 말에 의하면 <The End of the Tour>는 유명한 작가(사람)와(과) 유명해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해 괴로운 기자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담은 영화다.

  물론 모든 영화에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립스키와 윌리스의 대화를 영화로 만든 목적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The End of the Tour>는 나와 다른,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과정의 한 부분을 조심스레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한 개인이 오로지 자신을 주체로 자기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이른바 성장통을 격려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윌리스의 자만심과 위선을 찾으려 했던 립스키의 질투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한 예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린 그 예를 통해 스스로를 생각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가지면 된다.

  

출처: 영화  <The End of the Tour> 중

 

 아마  <The End of the Tour>의 절정은 바로 이 장면이었을 것이다.


 "안 유명한 척, 부담스러워하는 척, 그 행동들이 모두 위선이에요! 그러면서 또 날 깔보고 있잖아요!"


  잔잔하고 쓸데없게 느껴지던 그들의 대화가 사실 피 튀기는 인생(삶)의 대화였음을 우린 드디어 졸음에서 뛰쳐나와 깨닫게 된다.

  그리곤 윌리스를 몰아붙이는 립스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그 후로도 전혀 마음이 편치 않아 괴로워하는 그를 발견하게 된다.


  윌리스에게 자신의 속을 내보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그동안의 행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윌리스가 지금까지 자신과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음을. 윌리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철학적인 물음들을 립스키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스스로와도 깊게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스와의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택배 한 상자가 도착한다.

  자신의 신발 한 짝이 담긴 택배. 립스키는 그 신발을 보고  풀 수 없는 물음을 함께 공유하고자 했던 그의 직설적인 언어들이 자신을 향한 비야냥이 아니었음을, 그저 부러움과 질투에 눈이 먼 자신의 편견(착각)이었음을 다시 한번 더 알아차린다.


  이후 립스키는 윌리스의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로 인해 그 시간들은 덜 외로운 시간이었다." 


  우린 각자의 삶의 방식을 통해 남과 다른 기준을 정하고, 그 규칙에 익숙해진다. 따라서 겉에서만 보이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과연 나와 뭐가 다를까?'란 순수한 물음에서 시작하면서. 그리곤 하필 제일 나약해져 있는 자신과 상대방을 비교해 자신의 외면을 가꾸고, 내면을 한 단계 더 위로 올려놓으려 한다. 그 무의미한 욕심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붙잡고 있는지도 충분히 알면서 말이다.

  

출처: 영화  <The End of the Tour> 중


  나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The End of the Tour>를 본 후 한참을 뜸 들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 작품에서 뭘 보고 들었으며,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뭐, 영화를 보는 내내 졸음과 사투를 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립스키처럼 뒤늦게 두 사람의 이유 있는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The End of the Tour>는 정말 여행을 끝마치고 여행 내내 찍었던 사진을 보며 다시 그 시간을 되뇌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고로 이제 나에게도 택배 한 상자만 배달되면 끝이다.

  아님 립스키의 근사한 한 마디로 이 여행의 끝을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다.


  '<The End of the Tour>으로 인해 덜 억울한(?) 시간이었다.'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더 나아가지 못한, <매혹당한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