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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 / 정호승 시인

창비시선 322 / 정호승 시집,『밥값』2010

by 우란

벽돌 / 정호승



위로 쌓아올려지기보다 밑에 내려깔리기를 원한다

지상보다 먼 하늘을 향해 계속 쌓아올려져야 한다면

언제나 너의 발밑에 내려깔려

누구든 단단히 받쳐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어느날 너와 함께 하늘 높이 쌓아올려졌다 하더라도

지상을 가르는 장벽이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산성이나 산성의 망루가 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 동네 공중목욕탕 굴뚝이나 되길 바란다

때로는 성당의 종탑이 되어 푸른 종소리를 들으며

단단해지기보다 부드러워지길 바란다

쌓아올린 것은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므로

돌이 되기보다 흙이 되길 바란다




(주)창비

창비시선 322

정호승 시집,『밥값』2010

(초판 1쇄 발행 2010년 11월 5일)

69쪽



나는 그래


시를 거꾸로 읽는다.
제대로 읽고도, 거꾸로 읽고도 같은 마음이라
다행스러운 밤이다.

벽돌을 나의 안전핀이라 여겨도 좋고
흙을 나의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나
변함없이 고려해 주길 바라는 점은,
뭐든 날 지킬 수 있는 존재로
오직 나를 떠올려주길.

가면을 쓰고 한동안 시간 속에 흘러도 좋고
본체로 며칠을 굶어도 좋고
가짜인 척 연극을 한 편 올려도 좋은 날들.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는 일.
나를 반성하게 하는 법을 익히는 일.
벽돌을 쌓고
흙으로 형태를 바꾸고
그렇게 나를 위해 사는 법.

다시 거꾸로 읽는다.
바라지 않는 일들이
바라는 법 없는 일들이 혼재되어
벽돌이든 흙이든 되어도 좋으니

반드시 가장 밑바닥엔 내가 있자.
내가 가장 밑바닥에 반드시 자리하자.
우리 함께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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