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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불행 / 정호승 시인

창비시선 322 / 정호승 시집,『밥값』2010

by 우란

충분한 불행 / 정호승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주)창비

창비시선 322

정호승 시집,『밥값』2010

(초판 1쇄 발행 2010년 11월 5일)

37쪽



나는 그래


혼자인 시간, 수많은 생각을 밀어내고
믿음을 생각한다.

믿음이 부족하고
믿음이 충분하고
또 믿음이 믿음직스럽지 못함을 되뇌며
믿음을 믿음이라 부르는 대신
행복과 비슷한 불행이라 한다.

(단, '충분한 불행'은 언제나 충분한 행복은 아님을 미리 밝힌다)

불행과 행복, 행복과 불행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더러운 물', 그동안 열심히 양동이에 받았던 물의
출처가 사실은 나뿐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가 나의 '깨끗한 물'을 침범하며
얼마나 즐기고, 괴로워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자가 아닌지라,
또, 그만큼 극단적으로 나 역시 그의 물을 찍어 맛봤을 터라
결과적으로 믿음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

믿음을 생각하고, 불행을 떠올리는 이 과정은 슬프다.
애처로움이 그에게 위로된다는 말이
저 멀리서부터 들리는 듯도 하고.

괜히 혼자, 중얼거린다.
충분함과 충만함의 차이를 따져본다.
불행도 충만하면 행복이 되는 그런,
영화 같은 순간이 올까.

그럼 그도, 나도 '종착역에 내려도'
평안하게, '충분히 불행'하다고
중얼거릴 수 있을 듯한데,
믿을 수 있을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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