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322 / 정호승 시집,『밥값』2010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기 위해
넥타이를 매고 단정히
증명사진을 찍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슬픔 이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서
증명사진에 내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주)창비
창비시선 322
정호승 시집,『밥값』2010
(초판 1쇄 발행 2010년 11월 5일)
97쪽
나는 그래
나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그 순간의 마음을
딱 한 문장으로 내 귀에만 들리도록 속삭인다.
그렇게 모은 문장은 과연 얼마나 될까.
물리적으로 셀 수도 없을뿐더러
잊히는 게 당연한 시간이란 배를 탄 나로선 당연한 얘기니,
현재 내가 곱씹어 볼 수 있는 건,
최근에 찍은 증명사진을 위한 한 마디다.
한 문장의 탄생 과정은 이러하다.
첫째, 왜 찍는지 정확히 인지한다.
둘째, 인지했다고 해서 내가 정말 명료하게 아는지 생각한다.
셋째, 사진이 찍히는 순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무엇인가.
'증명사진에 내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는 시인의 한 마디.
나의 증명사진이 뱉은 한 마디는,
방금 전 내가 떠났다,
내가 나오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