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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 편지 / 문혜진 시인

©문혜진,『질 나쁜 연애』2004

by 우란

시금치 편지 / 문혜진



나는 올리브 당신은 뽀빠이 우리는 언제나 언밸런스, 당신은 시금치를 좋아하고 나는 먹지 않는 시금치를 요리하죠 그래서 당신께 시금치 편지를 씁니다 내가 보낸 편지엔 시금치가 들어 있어요 내가 보낸 시금치엔 불 냄새도 없고 그냥 시금치랄 밖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지요 끓는 물에서 금방 건져낸 부추도 아니고 흙을 툭툭 털아낸 파도 아니고 돌로 쪼아낸 봉숭아 이파리도 아니고 숭숭 썰어서 겉절인 배춧잎도 아니에요 이것은 자명한 시금치 편지일 뿐이지요 당신은 이 편지를 받고 시금치 스파게티를 먹으며 좋아라 면발 쫙쫙 당기겠지만 나는 동네 공터에서 개똥을 밟아가며 당신을 위해 시금치 씨를 뿌리고 있답니다 시금치가 자라면 댕강댕강 목을 베어버리겠어요! 그때…… 다시 쓰지요.




(주)믿음사

믿음의 시 118

©문혜진 시집,『질 나쁜 연애』2004

21쪽



나는 그래


식어가는 마음과 불타오르는 마음은 구분하기 어렵다

두 편이, 두 개가, 두 사람이
같은 걸 품고 만난다고 단언하기 어렵고
억지로 단정해도
결국 '자명한 시금치 편지일 뿐'이니까.

마음은 마음으로만 남지 않는다.
해서 마음을 나누는 일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왜곡에 대항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마음뿐이다.
한탄스럽지만 편지에 늘 '시금치'가 든 이유겠지.
해서, 기어이 편지를 쓴다.
또 편지를 쓰기 위해 또 마음을 심고.

마음들은 구분하기 어렵든 말든, 반드시, 계속, 자라야만 한다.

다시 쓴다.
전하지 못한 말과 전하고 싶은 말을 섞어
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외계 편지를.

쓰고 나면 나는 없고 시금치만 남는다.
해서, 정체불명의 마음들이 솟으면 또 쓴다.

당신이 알아보든, 알아듣든, 알아내든 상관없이.

나도 마찬가지로 시금치 비슷한 뭔갈 씹어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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