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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의 일 / 박찬일 시인

©박찬일,『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2002

by 우란

증발의 일 / 박찬일



세상 일 중 가장 마지막에 있는 일은 증발하는 일. 증발해 주는 일. 그전에 있었던 일들과 이 일은 상관없는 일, 독자적인 일. 이후 벌어지는 일들과 이 일은 상관없는 일, 독자적인 일.


분명히 있는데 분명히 없으므로 증발의 일.




(주)믿음사

믿음의 시 113

©박찬일 시집,『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2002

31쪽




나는 그래


사라지는 일은 사라진다.
해서 우리는 사라지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의견들이 아주 첨예하게,
너와 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그래도 우린 그것이 사라지는 일 자체를 없앨 수 없다는 사실에
또 안도한다.

증발하는 일은, '독자적인 일'이다.
'독자적인 일'은 그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침범당하지도 않는다.

안도하는 일에서 안도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사라지는 방식으로 수다를 떤다.
대수롭지 않은 우스갯소리처럼,
뻔한 농담처럼,
진지한 인생철학 설파처럼,
기억조차 희미해져 했던 얘길 또 하듯이,

이때쯤이면 알게 된다.

사실 우린 어느 때보다
열렬히
살아가는 방식을
논하고 있음을.

살아가는 일은,
일인칭 시점은 물론, 독자적인 시스템.

사라지는 일은 사라진다, 반드시.
나와 네가 당연히 살아가는 일을 살아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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