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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 박소란 시인

창비시선 386 ©박소란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2015

by 우란

푸른 밤 / 박소란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가 별자리를 되짚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주)창비

창비시선 386

©박소란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2015

106-107쪽




나는 그래

그녀가 사는 이유를 물었다.
삶을, 인생을 사는 이유를 물었다.
내겐 첫 물음이었지만, 이미 수많은 이에게 청한 호소임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건
자신뿐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다고 한들 그녀의 호소를 멈출 순 없으리라.
어둠 속에서 우주보다 더 넓은 천장을 보며
막막한 혼잣말을 뿜어내는 존재가, 정말 그녀뿐이겠는가.

대신 밤에 일기를 쓴다고 했다.
참회와 후회를 담는 날도
기쁨과 환희를 담는 날도 있어서
무료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무료하지 않는단 말이 그녀에게 다른 미사여구보다 먼저 닿길 바랐다.
무료함에 담긴, 나의 응원을 조금 눈치채주길.
세상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태반이고, 당연하고
그녀와 내겐 '푸른 밤'을 지날 순간들만 주어지니까.

결국 바꿀 수 없는 건,
그런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니 바꿀 수 있는 건, 이미 답이 나와있지 않냐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간다는 믿음.
이미 지나간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나와, 그녀에게
왜 이리 빨리, 허겁지겁 갔느냐고 밤을 새우며,
헛헛한 마음을 토로하며 일기 쓰는 일.

그러다 보면, 차츰 알게 되지 않을까.
'이제는 이해한다'
숱한 갈증도 '그만 다 이해한다'

살아가기에 이해한다,
잡고 싶어도 결코 잡을 수 없는 푸른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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