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256, ©박남준 시집,『적막』2005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 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꽃의 무상함도 다만 일별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 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 갔던 건
거기 내 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주)창비
창비시선 256
©박남준 시집,『적막』2005
42-43쪽
나는 그래
밑동만 남은 나무.
잘려나가든, 부러지든, 파괴되든
뿌리는 악착같이 살아남고 보는
그것이 결코 살아남았다 단언할 수 없지만
밑동만 남은 나무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살아남았다는 위안을 주는
밑동만 남은 나무.
후회고 미련이고 회한이 한 뿌리,
그리움이 한 뿌리,
모든 걸 지나오는 시간에 또 한 뿌리,
홀로 밑동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생각하고 구분하다 보면,
결국 내 이야기를 생판 모르는 죽은 나무에게 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동백의 숲까지' 나도 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듯.
'동백을 보러 갔던 건 거기 내 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다른 건 다 잘려나가고, 떨어지고, 부패되어 설령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결국 나는 날 위로하려, 날 다시 일으키려 이토록 애를 쓰는구나.
동백의 숲엔 동백만 피고 진다.
그도 애를 쓰는 거지.
다들 애를, 쓰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