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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 박소란 시인

창비시선 386 ©박소란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2015

by 우란

없다 / 박소란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길들여지지 못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깊고 어두운 곳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은

이곳에 주소가 없다는 것을


집이 없다는 것을

상기된 표정으로 커튼을 열어젖히는 얼굴이

발갛게 피어나는 식탁이 풋잠을 머금은 나릿한 하룸이

없다는 것을

아침은 이미 이곳으로 오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밤의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주린 속 깊숙이 손을 찔러본다

짐승은 파르르 떠는

또다른 짐승의 야윈 손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짓궂은 장난 같은 차가운

피, 피가 흐르고


당신은 어떻게 알았을까

울음이 없다는 것을

컹컹 짖는 법을 나는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오랜 침묵의 우체부인 당신은 어떻게

어떻게 알았을까




(주)창비

창비시선 386

©박소란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2015

16-17쪽




나는 그래

몇 번의 탈출 시도였을까
떠올려 보면, 열손가락이 모자라고
가늠해 보면, 모자란 일이 또 없는 듯하고.

내게 울음은 주로 상심의 편지다.
고통보다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어딘가 툭 결려버린

당연히 춥고 차갑고 어둡다
아침 햇살 같은 웃음도,
아침 식탁에서 만날 이들과의 설렘도
없는, 그런 온기의 길은 없는.

'짓궂은 장난 같은' 한기를 머금고
'울음이 없다'는 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심이 풀어내는 가짜 이야기.

내가 주인공이지만 벗어나고 싶은 이야기
하나쯤은 다들 있겠지 하며 사는 중인 셈.
그래서,
'밤의 우체통'은 매일 비워지는 게 아닐까.
뻔한 위로도 위로가 되는 법을 배우는 듯하다.

어느 날인지도 모르는 날,
대뜸 찾아와 편지를 쓰지 않았다며
책망할 마음은 추호도 없으나,
나처럼 '컹컹 짖는 법'을 배운 적 없는 발신자들이 궁금한 밤.

동지들이 소리 내 우는 법 없이
우체통을 채운다

난 가끔, 그 사실만으로,
다 써 내려가지 못한 상심을 채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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