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2011,『눈앞에 없는 사람』
나에게는 6일이 필요하다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나날이 필요하다
물론 너의 손이 필요하다
너의 손바닥은 신비의 작은 놀이터이니까
미래의 조각난 부분을 채워 넣을
머나먼 거리가 필요하다
네가 하나의 점이 됐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단 한 발짝 떨어진 셈이니까
수수께끼로 남은 과거가 필요하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는
단 한순간이 필요하다
그 한 순간 드넓은 허무와 접한
생각의 기나긴 연안이 필요하다
말들은 우리에게서 달아났다
입맞춤에는 깊은 침묵을
웅덩이에는 짙은 어둠을
남겨둔 채
더 이상 말벗이기를 그친 우리......
간혹 오후는 호우를 뿌렸다
어느 것은 젖었고 어느 곳은 죽었고
어느 것은 살았다
그 어느 것도 아니었던 우리......
항상 나중에 오는 발걸음들이 필요하다
오직 나중에 오는 발걸음만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 그것인, 아닌,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인,
모든 것이......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2011,『눈앞에 없는 사람』
22-23쪽
나는 그래
어릴 적, 지폐 한 장으로 무엇을 사고 싶냐는 질문에
사람의 마음을 사고 싶다고 답했다.
나이 어린 친구의 순수한 한 마디는
어른들의 예쁜 포장지에 싸여, 꽤 오랫동안 뿌듯한 추억으로 남았고,
내게도 잊히지 않고 여전히 남았다.
그땐, 그랬다.
돈과 명예를 알기엔 터무니없이 해맑았고
사랑과 우정을 소화하기엔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다.
과자나 게임기, 스케이트 혹은 놀이공원 표를 사고 싶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반짝거리고 싶었는지도,
부모에게 칭찬 한 마디 더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떠도는 말에 상처받고 손가락질 한 번에 흔들렸던 때를
굳이 함께 기억할 필요는 없었으니,
그땐 그랬던 거야- 하고 두고 나왔다.
지금 다시 답한다면, 조금은 더 구체적이고 세심하게,
또 강력하게 답하고 싶다.
따뜻한 사람들의 귀중한 말과 소중한 행동을 사고 싶다고.
그래, 현재 내게 필요한 건 안전지대다.
안전지대에 들어선 이들에게만큼은 하염없이 무력해지고 싶다.
우리 마음이 쉽게 소멸하는 걸 막고 싶고
우리들의 이해심이 몇 겹의 이기심으로
맥없이 흩어지는 걸 아깝게 여기고 싶다.
막상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아무것인' '발걸음들'을 모으고 싶다.
그냥, 그렇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