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눈사람 여관』2013
나를 깎아서
바늘을 만들어야지
바늘을
발바닥에 꽂고
걸어서 가야지
누구나 문을 만들고
누구나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걸음을 디딜 때마다
생각에서 피가 날 것이고
그 생각의 끝은 더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되어
내 머리를 찌를 것이라
찌른 바늘은
한 부위에 깊숙이 구멍을 파고 들어가
혈관을 따라 나를 훑을 것이니
바늘이 되어야지
피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누구나 눈을 질끈 감듯
행여 다정을 바라지는 않으리라
다정과 한몸이 되더라도
단 한 번 삐끗하면 삐끗한 마음에 찔릴 것이라
내 바늘로 나를 꽂으리라
그러지 않으면
단 한 번 스치기만 한 그 사람의
붉고 뾰족한 것에 긁히고 휩쓸려
사정없이 곪을 테니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34
©이병률,『눈사람 여관』2013
78-79쪽
나는 그래
다,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서글프고 서럽고 그런,
감정들이 마음을 먼저 지배하는 걸 막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믿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깎아서 / 바늘을 만들'까.
만들고 나면 만족은 할까, 아니 만족할 수는 있을까.
너무 가슴이 쿡쿡거리면,
다르게 생각하기 도전에 뛰어든다.
바늘의 탈을 쓴 만능 돋보기를 만드는 중이라고.
돋보기로 한참 내 속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마음을 다지고, 돋우는 중이라고.
어떨 땐, 정말 돋보기로 보여서 한참, 치료하기도 한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다신 없을 기회란 걸 알 듯이.
그러니까, 우린 단련하는 중이다.
(너란 바늘에 얼마나 찢길지 몰라서, 란 말은 쏙 빼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