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 정호승 시인

창비시선 362 ©정호승, 2013,『여행』

by 우란

여행가방 / 정호승



너는 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니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려고 그러니

이곳은 더이상 머물 곳이 아니야

어머니는 떠나시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이미 떠나셨는데

너는 도대체 누굴 만나려고

머뭇거리고만 있는 거니

그동안 내가 무거웠다면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 있어

떠나가는 동안에 가끔 노래도 부르고

배고프면 컵라면 하나 사 먹고

잠시 풀잎 위에 머무는 바람이 되면 돼

그동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내 너를 위해 떠났지만

이젠 네가 나를 위해 떠나야 할 때야

제발 나를 이곳에 처박아두지 말아줘

떠나지 않으면 여행이 아니야




(주)창비

창비시선 362

©정호승, 2013,『여행』

16쪽


나는 그래

그래 '떠나지 않으면 여행이 아니'다
여행만 아닌가
여행도 아니게 된다
삶도 아니게 되고
일상도 아니게 된다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
하필, 일상을 만들고 생을 부추긴다

새로 보고 듣고 품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등을 떠미는 걸까
'언제까지'란 말을 들먹이면서

머뭇댄다
아마 평생 나는 머뭇댈지도 몰라
'여행가방'을 싸면서
한 해, 한 해 나를 내가 꾹꾹 눌러 담으며

다시 날 다그친다

'내 너를 위해 떠났지만
이젠 네가 나를 위해 떠나야 할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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