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그림자 / 정호승 시

창비시선 362 ©정호승, 2013,『여행』

by 우란

희망의 그림자 / 정호승



내 지금까지 결코 버리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그림자다

버릴 것을 다 버리고

그래도 가슴에 끝까지 부여안고 있는 게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해질녘 순댓국집에 들러 술국을 시켜놓고

소주잔을 나누는 희망의 푸른 그림자다

희망의 그림자는 울지 않는다

아무도 함께 가지 않아도 스스로 길이 되어 걸어간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중에서 가장 큰 죄악은

희망을 잃는 것이라고

신은 인간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주지만

절망에 빠지는 것은 결코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희망이 희망의 그림자에게 조용히 말할 때

나는 너의 손을 잡고 흐린 외등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막다른 골목길을 돌아나온다





(주)창비

창비시선 362

©정호승, 2013,『여행』

55쪽


나는 그래


희망을 가슴에 품는 것과
희망을 믿는 것은 같지만 다르다
나를 가엽게 다루는 것과
나를 가엽게 여기는 것이 다르듯

희망의 실체를 생각한다면 조금 더 낯설지 않으려나
희망이 실재한다는 확신만 있다면
분명 어렵지 않을 텐데

희망이 아니라 '희망의 그림자'를 믿기로 하자

희망의 그림자는 어디에나 있다
누구에게나 드리우고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냉큼 버리기도 어렵고.

설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은 없겠지
믿고 싶음과 믿고 싶지 않음을 헷갈려하는 이들도 없을 거고.

모든 걸 다 잃고 무너지기 일보직전
역시 이 방법뿐이다

희망의 그림자를 따라 걷자, 우리 함께 걷도록 하자.

날 온전히 믿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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