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길 / 김혜순 시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140 ©김혜순, 1994,『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by 우란

서울 길 / 김혜순



내 마음엔 웬 실핏줄이 이리도 많은지요 이 실핏줄을 다 지나야 그곳에 당도하게 되겠지요 왜구가 출몰하여 강화도로 피난 가셨다고도 하고, 중공군 피해 해협을 건너셨다고도 하였지만 나는 수백 년 길 속에 갇혀 걷고만 있었지요 내 마음엔 웬 다리가 그리도 많은지요 매일 아침 다리를 건너 강 저쪽에 닿았다가 매일 저녁 다리를 건너 강 이쪽으로 돌아와요 마음의 저편 산자락 아래까진 가보지도 못했어요 그쪽에서 약수가 터져 마음 한 자락 싱싱하게 살아났다는 풍문 들었어요 당신이 그 물을 달게 마셨다고도 하고, 그냥 지나치셨다고도 하는 소문 들었어요 가슴 밑 어두운 산을 뚫고 나도 모르게 굴이 뚫렸다는 소식도 전해들었어요 어디 계신지요 며칠 만에 시내에 나가보면 아직도 포장도 안 뜯은 새 건물이 제본소에서 마악 도착한 신간 소설책 뭉치처럼 부려지도 있어요 날마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늘어나요 길 속에 길이 있어요 지금 막 도착한 저 빌딩의 몸 속을 좀 들여다보세요 층계와 층계 사이로 불켠 실핏줄들이 보이잖아요? 저 길을 언제 다 지나 당신에게 당도하지요? 서울이 서울을 낳아요 마음이 제 몸을 한껏 부풀려 또 마음을 낳아요 거기로 이삿짐을 가득 실은 차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또 실핏줄이 엉겨붙어요 샛길이 나요 발을 디뎌보지도 않았는데 또 길이 나요 언제 저 길을 다 뒤져 당신을 찾아내지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140

©김혜순, 1994,『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82-83쪽


나는 그래

보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아주 긴 편지를 가장한
아주 긴 이야기를 쓴다

보고 싶은 마음은 쓰고 읽어도
결국 어려운 수수께끼
마치 거미줄의 시작과 끝을 반드시 다 알아야만
풀 수 있는 이야기 같다.

할 수 있는 일은,
보고 싶다는 마음을
숨길 필요 없는
혼잣말들

혼잣말엔 엄청난 힘이 있다
정말 엄청난 이야기가 있다
끝이 없는, 결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 그리움을
담아내는 아주 어려운 길-
해서 길을 걷는 건 용기 있다

'내 마음'에 많은 '실핏줄'이 엉키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에
나의 혼잣말엔 잊히지 않는 그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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