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362 ©정호승, 2013,『여행』
종착역도 없이 나를 내려놓고 기차는 떠나간다
종착역이 어디인 줄도 모르고 먼저 도착한
친구의 슬픈 기차가 나를 바라본다
신호등도 없는 건널목을 건너 철길 밖으로
그동안 들고 다녔던 운명의 검은 가방을 던져버리고
기차가 차창 밖으로 순간순간 영원히 보여주던
무논의 푸른 벼포기에 발을 담근다
종착역도 없는 역에 나를 내려놓고 떠나간 나의 기차여
논물 속에 어리는 흰 구름의 품에라도 안겨 잠시 쉬고 싶다
농부의 다정한 발소리에 귀 기울이며 바람에 흔들리거나
무논가에 비딱하게 서 있는 전봇대가 되거나
백로 한마리 오랫동안 외발로 서 있는
무논의 해 지는 풍경이 되어 저물고 싶다
출발역을 향해 출발하는 기차는 아직 있는가
종착역도 없이 나를 내려놓고 떠나간 나의 기차는
아직도 나를 떠나고 있는가
(주)창비
창비시선 362
©정호승, 2013,『여행』
107쪽
나는 그래
나를 지나쳐간 시간을 떠올린다
어떤 일을 떠올리고
또다시 잊고 싶었던 나를 불러온다
결국 나는 나였던 나를 만나 무엇을 얻고 싶은 걸까
고심하고 또 고심해도
딱 하나만 부탁하고 싶다
그간 내게 왔고
내가 했던 후회를
'나의 기차'에 태우고 싶다.
종착역이 어딘지 모르는,
실재하는 지도 확실치 않은
그럼에도 없는 선로를 만들어
주야장천 갈길 가는
나도 세울 수 없고
친구도 어찌할 수 없는
기차에게 부탁한다
우리 같이
결국 '아름'다워 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