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 2006,『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늙은 길이 내 발밑에 제 몸을 기댄다
그 오랜 세월을 너도 나와 같이 지내왔구나
내 혀끝에 남은 몇 마디 말이
검은 열매처럼 후드득 져 내리는 이곳에 나는 홀로 서서
어둠을 기다린다 빈 터에 쌓인 먼지들이 날아올라
산책 길을 휩싸고 도는 늦가을의 저물녘
흔들리는 발걸음에 길도 따라서 흔들리고
풍경은 자꾸 내 시선을 비껴간다
알 수 없다 내가 기대한 모든 것이
지금 길 끝에서 마지막 잔광을 흩뿌리는 햇살처럼
덧없다는 것,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이
새가 날아가고 난 다음의 텅 빈 하늘처럼 무연하다는 것
늙은 길은 더듬거리며 언덕을 넘어가고
추억은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다
지나간 것은 다 녹슬거나 망가져버렸다
내게 남은 것은 쓸쓸함이 불러일으키는
지난날의 몇몇 사소한 영상들뿐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파람을 불며
나는 짐짓 늙은 길에 내 발자국을 기댄다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21
©남진우, 2006,『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124-125쪽
나는 그래
나와의 이별을 죽음 대신 '저녁 산책'이라 부른다
그때가 되면 나보다 '늙은 길'이 반가울까
친구 같을까 언어만 다른 후회 투성이면 어쩌지
그런 건 절대 '사소한 영상'이 아닌데
추억을 추억이라고만 할 수 없듯이
계절을 타듯
시간을 타며
같이 걷는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와 없어질 나를 데리고
난 내 '늙은 길'을 동행하는 건지
따라가는 건지 영영 모르겠지
답을 알게 되면 정말 '저녁 산책'에 성공했다,
단언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는 모든 걸 흘려보낼 수 있을까
무슨 수로 의연하게
'덧없이' 밤공기 마시며 걸을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