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 2006,『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헌책방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들춰본다
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니
낯익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전생에 내가 썼던 글들 아닌가
전생에서 전생의 전생으로 글은 굽이쳐 흐르고
나는 현생의 한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
한 세월 한세상 삭아가는 책에 얼굴을 박고
알 수 없는 나라의 산과 들을 헤매다 고개를 드니
낡은 선풍기 아래 졸고 있던 주인이 부스스 눈을 뜨고
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 말한다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책을 꽂고
조용히 돌아서 나온다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21
©남진우, 2006,『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51쪽
나는 그래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우린 다 이어져 있다
전생으로 엮여 현생으로 되풀이된다.
어쩌면 우린 다 나였을지도
문젠 나였음에도 우리였던 적이 없었다는 것.
그 외 세상에 읽히지 않는 글은 없다.
긴 낮잠을 위해선 나를 알아보는 일에 능숙해야 한다
우린 나를 나로 잇는 일 말고는 맘 편히
긴 낮잠을 잘 수도, 살아낼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한 인생은 짧고
모두가 매일 얻는 낮잠은- 길다
'헌책방 으슥한 서가 한구석'
누구나 다 아는 그곳에 늘 내가 있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