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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Mar 16. 2018

나평강 약전(略傳)

나희덕 시인



 나평강 약전(略傳)   /  나희덕




  그는 얼마간의 가축을 키웠다 

  병아리들을 부화시켜 마당에 놓아먹였고 
  입덧이 심한 아내를 위해 
  얼룩 염소 한 마리를 사다가 젖을 짜 먹였다   

  염소가 언덕에서 풀을 뜯을 때 
  가만히 앉아 무슨 생각인가를 한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염소가 풀을 다 뜯은 후에도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언덕의 풀처럼 나지막하고 바람에 잘 쓸리는 사람이었다 

  닭 키우는 걸 좋아했지만 
  죽은 닭은 잘 만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갓 낳은 달걀과 
  마악 짜낸 염소젖, 
  생전에 그가 식구들에게 건네준 전부였다 

  그보다 따뜻한 것을 알지 못한다 



  계간《시산맥》

  2018년  봄호


* 나는 그래

요즘 나는 새로움에 특별함을 느끼지 못해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앞으로도, 아니.
오늘도 내일도 매번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할 것 같다. 

다 잊어버렸다. 그들도 나도.

오랜 시간 신뢰를 견고하게 쌓은 관계도 이렇게 위태로울 수 있을까.

과거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개인의 다른 생각이 그들의 틀린 생각이 되어가는 당연함을 당연하다 생각하는 오늘의, 미래의 나를. 
금기와 다를 바 없었던 신뢰는 실체가 없음에도 무한성을 띄고 그들을 치켜세우느라 바쁘다. 

아마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죽은 것들에게도 '신뢰'를 강요했을 것이다.

이모가 그랬다.
"다 엿 먹으라고 해. 인간은 결국 혼자야."

그녀의 말속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꼈다.

그 욱신거리는 뜨거움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모든 긍정은 사실 부정의 자기부정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젠 너무 잘 알아 다 헤아리지 못하고, 마음 편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입모양까지 그대로 복사하는 능력이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다. 

평생, 그보다 더 따뜻한 것을 알 수 없으면 어쩌지. 
무섭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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