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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Jan 05. 2018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이병률 시인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이병률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어디엔가 눈을 받아두기 위해 바닥을 까부수거나 내 몸 끝 어딘가를 오므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애써 뒷모습을 보이느라 사랑이 희기만 한 눈들, 참을 수 없이 막막한 것들이 잔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명으로 세상을 저리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저 눈발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주)창비

창비시선 270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중



* 나는 그래


  거짓말과 흰 눈은 다를 바 없다.

  무색무취은 물론이고, 진짜를 가려낼 수도, 찾아낼 방법도 없다.

  들키는 것만큼 스릴 있는 것도 없다.

  이 둘은 계속되기 위해 매 순간 들켜야 한다.

  이들의 영생을 위한 해답은 오로지 '반복'에 있다.

  

  오늘도 흰 눈이 내렸다. 거짓말에 도가 트면 사람들은 자신도 속이곤 하는데, 나는 속았음을 아는 나를 또 속였을 것이다. 추측은 수많은 가정 위에 피어난다.

  세상은 그 가정들을 모두 거짓말이라 하고, 흰 눈은 소리 없이 일을 키우는데 선수다.

  긍정과 부정을 모두 의미하기에 덮어도 보일 수밖에.

   

  나의 그런 하루는 몇 번쯤 반복돼도 괜찮다. 남들보다 젊고 건강해서가 아니라 어찌할 방도를 모르기에 혹은 내버려둬도 괜찮기에.   

  다만 모난 내 팔꿈치에 희끗한 서리가 자라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막막한 곳을 돋보이게 하는 그들만큼 깨끗한 것도 없을 것이다.


  흰 눈을 보면 남보다 먼저 발견한 마냥 "첫눈 내리고 있는 거 알아?"라고 귀여운 허세를 부리는 그에게 "나에게 첫눈은 아직이야."라고 받아칠 줄 아는 '그'가 늘어나고 있음을 당신은 느끼고 있는가.

  

  고백하건대 거짓말은 내 인생의 90%를 독점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존재하는 모든 곳엔 흰 눈이 왔다 간다.

  굳이 '첫눈 보기'에 매달일 필요 없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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