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후예들 / 이병률 시인

by 우란


약속의 후예들 / 이병률



강도 풀리고 마음도 다 풀리면 나룻배에

나를 그대를 실어 먼 데까지 곤히 잠들며 가자고


배 닿는 곳에 산 하나 내려놓아

평평한 섬 만든 뒤에 실컷 울어나 보자 했건만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그대는

내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주)창비

창비시선 270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2006

98쪽




나는 그래


너무 무거웠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나를 무겁게 했는지 모르지만,
땅이 끌어당기는 힘에 나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주저앉고 보니 그들과 눈높이가 맞춰졌다.

아, 그들은 여전히 알지 못하는구나.

자신의 그 대단스런 것들에 묻혀 사는 사람들.
내가 인상을 구기며 온갖 욕설을 퍼붓지 않았어도 됐을 일들이었다.
진정한 민낯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한 지침서가
이 세상에 암암리에 퍼져있었단 걸,
이제 찾은 것 같다.
자신의 민낯을 까발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그들에 대한 설명서 말이다.

나만 신성하다 말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을
나 혼자 잘난 척하듯 떠벌리고 다닌 기분이었다.
마냥 즐거운 악수는 아니지만,
온갖 미사여구로 꾸미고 색을 칠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 약속인데도.

작은 눈을 크게 뜨고,
큰 눈을 더 크게 뜨면서 거울 속 자기를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눈이 보내는 간절한 신뢰에 답할 줄도 모르면서.

손발을 쭉쭉 뻗어가며, 이빨을 요란하게 부딪치면서,
할 수 있는 그 모든 행위를 통해 발을 구르고 또 구른다.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게 타인을 위한 자신의 예술이라 말하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얘기하려고 그림자를 떼어놓고 다니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내가 도대체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싶지만
생각해보니 내 집에도 거울이 떡하니 걸려있고,
거울 속 내 눈의 언어를 매일 정확히 읽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를 심히 부끄럽다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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