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
강도 풀리고 마음도 다 풀리면 나룻배에
나를 그대를 실어 먼 데까지 곤히 잠들며 가자고
배 닿는 곳에 산 하나 내려놓아
평평한 섬 만든 뒤에 실컷 울어나 보자 했건만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그대는
내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주)창비
창비시선 270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중
너무 무거웠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나를 무겁게 했는지 모르지만, 땅이 끌어당기는 힘에 나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주저앉고 보니 그들과 눈높이가 맞춰졌다.
'아, 그들은 여전히 알지 못하는구나.'
자신의 그 대단스런 것들에 묻혀 사는 사람들.
내가 인상을 구기며 온갖 욕설을 퍼붓지 않았어도 됐을 일들이었다.
진정한 민낯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한 지침서가 이 세상에 암암리에 퍼져있었단 걸, 이제 찾은 것 같다. 자신의 민낯을 까발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그들에 대한 설명서 말이다.
나만 신성하다 말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을 나 혼자 잘난 척하듯 떠벌리고 다닌 기분이었다.
마냥 즐거운 악수는 아니지만, 온갖 미사여구로 꾸미고 색을 칠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 약속인데도.
작은 눈을 크게 뜨고, 큰 눈을 더 크게 뜨면서 거울 속 자기를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눈이 보내는 간절한 신뢰에 답할 줄도 모르면서.
손발을 쭉쭉 뻗어가며, 이빨을 요란하게 부딪치면서, 할 수 있는 그 모든 행위를 통해 발을 구르고 또 구른다.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게 타인을 위한 자신의 예술이라 말하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얘기하려고 그림자를 떼어놓고 다니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내가 도대체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싶지만 생각해보니 내 집에도 거울이 떡하니 걸려있고, 거울 속 내 눈의 언어를 매일 정확히 읽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를 심히 부끄럽다 여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