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 시인
투명 상자에 누에 네 마리가 들어 있다
딸애가 유치원에서 받아온 누에다
뽕잎 두어 장을 누에 상자에 넣어준다
곧 마지막 잠에 들겠구나, 아빠 징그러워요
주먹 쥐고 보던 딸애가 울음을 터뜨린다
뽕나무밭머리 뽕나무를 베어내고 지은 흙집에서 살았다
엄니 아부지는 누에섶 같은 그 뽕나무밭집에서
딸 넷과 아들 셋을 쳤다 시름시름 앓다 시들어
돌무덤으로 간 큰성을 빼고 나는 이 집의 다섯째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뽕나무밭집의 누에들이었다
정읍 산내(山內) 능다리재 너머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또 옆을 봐도 산만 보이던 마을
뽕나무밭집 여섯 누에들은 뽕잎 같은 날들을
사각사각 갉아먹으며 그냥저냥 잘 자랐다
갉아먹다 갉아먹다 갉아먹을 게 없으면
엄니 아부지 속도 박박 갉아먹으며 자랐다 때론
눈물도 나눠 갉아먹고 지독한 빚도 나눠 갉아먹었다
아부지는 옛 밤처럼 캄캄해진 지 오래고
칠순 넘긴 엄니는 고치같이 좁고 둥근 길을 돌아
뽕나무 밭집 근처 빈집으로 터를 옮겼다
네 마리 누에가 실을 토해 고치를 지었다
딸애 손에 고치를 들려 유치원을 보낸다
근데 아빠, 누에들은 다 어디로 갔어?
엄니 벨일 없지라이, 요번에도 또 못 내려갈 것 가튼디요
(주)창비
창비시선 338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 중
나는 그래
* 번뜩! 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어떤 결말을 맺을 진 아무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는데 익숙해져 간다.
그러나 그 익숙함을 다른 단어로 포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넘쳐난다.
가족이란 게 바로 그렇다.
뭘 해도 '가족이라서'란 말이 붙으면 뿜어져 나오던 말들도 어느새 고요해지고 생각조차 나지 않던 말들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
* 어지럽더라.
나도 누에였다. 아니 현재 진행형인가?
흠. 과연 내가 한 번이라도 실을 뿜어내긴 했을까. 갉아먹기만 하는 그런 눈치 없는 애는 아닐런지.
분명한 점은 난 부모를 갉아먹으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있다. 뭐 그 방식이 점점 나의 생각과 다를 때가 있어 난처하지만, 그로 인해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정말 긍정의 힘으론 못 이기는 믿음이 없다.)
그럼에도 한창 고민 많을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난 '갉아먹는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게 모두 건강한 슬픔이길 바라지만, 훅 들어오는 말들과 배가 차오르는 눈칫밥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얼른 집을 만들어 스스로 튼튼한 옷을 입길 바라는 그들의 잎사귀에 올라탄 내가 보인다.
무럭무럭 키 크라는 말로 예쁘게 포장한다.
어쩔 땐 모른 척 되새김질한다. "아직 입에 든 게 있어요." 하고.
자신이 없어서일까 싶기도 하고,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언제든 기회가 있을 거란 생각도 있어서일까 싶다.
사실 더 더 길게 늘어트려 얘기하고 싶다. 지금도 끝맺지 못한 말들이 내 눈앞에 떠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처럼 엄니에게 그렇게 어쩔 수 없다는 듯 얘기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설령 시원찮은 실을 뿜어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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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런 의지와, 자신감이라면, 한 번쯤 몰래 게워내도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믿어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