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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May 15. 2018

동백 전언

서안나 시인


동백 전언 / 서안나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었다
오후 내내 폭설이었다
집에서 앞 머리카락을 잘랐다
가려두었던 이마의 흉터가 선명했다

어릴 적 담장에 핀 동백을 따다
커다란 돌이 내 이마에 떨어졌다
흰 눈에 떨어진 선혈이
느리게 꽃을 읽어 내려갔다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다 보였다
나는 꽃의 끝이었다

동백을 보면
오줌이 마려웠다
첫 생리를 시작한 날도 동백이 피었다
숲을 더럽히고 싶었다
아플 때마다 꽃이 피었다

동백이 피면
꿈속에서
열 개의 손톱이 다 부러졌다
부러진 손톱에서 진흙 동백이 피었다
가위를 들고 종이 인형을 오리는 습관이 생겼다
빨리 죽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했다
인간의 죄는
손에 다 모여있다
죄가 묻은 동백은 밤에도 검다

이번 생은
내가 만든 산이라
혼자 넘어야 한다
무릎을 안으면 진흙이 묻어있었다

이제 모든 것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계절
뒤돌아보지 않았다 



계간 《문학의 오늘》 2018년 봄호




* 나는 그래 


나에게도 깊숙이 박힌 전언이 있다.

동백꽃처럼 붉게 타오르지 않아 싱겁기만 했던 말이었다. 


내가 태어난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었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재미있는 추억거리로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특별함을 도난당한 것 같았다. 

꼭 일어나야만 했던 일들이 제각각 리스트를 작성하자마자 식어버리진 않았을까.

내게 주어져야 했던 번호는 내게로 오기도 전에 타오르지 않았을까.

나도 꽃의 끝이고 싶다.

그 끝으로 가면 뒤돌아봐도 즐거울 것 같다.


커피를 오래 놔두고 먹는 고집이 있다.

따뜻한 커피를 시키고 한참을 뜸 들여 마치 이제야 눈 앞에 커피가 보인다는 듯 식어버린 커피를 마신다.

웃긴 건 혀에 닿는 미지근한 감촉이 싫어 최대한 이빨 사이를 침으로 틀어막고 꿀꺽한다는 것 그것도 매번. 

그리고 결국 눈치를 보며 얼음을 컵이 넘칠 때까지 넣는다. 

뭐, 얼음은 있는 힘껏 이빨로 깨부수며 먹는다. 

마치 내가 만든 산을 손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듯.


가까운 이에게 거짓말을 많이 한다.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처음 들었던 말이 "어머 코가 왜이라 낮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깊숙이 박힌 전언이 있다.

동백꽃처럼 붉게 타오르지 않아 싱겁기만 했던 말이었다.

다만, 쉽게 잊히지 않는 말들이었다.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나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부모의 거짓말이 나를 죽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전히 뒤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태어난 날 만든 산이 지금까지 만들었던 산처럼 완만한 언덕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전언이 뭉개져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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