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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연 Mar 14. 2022

가끔 좀 외로워도 괜찮다 (1)

외로움에서 서핑하는 법을 연습 중


새벽에 문득 복잡한 생각들이 나를 새까만 지하실로 끌어내릴 때가 있다. (C는 심연이라고 표현했다).


알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들지만 나는 그것을 종합해서 ‘외로움’이라고 진단했다. 그 순간 느끼는 결핍도, 슬픔도, 공허도 결국 이 세상 그 누구도 온전히 알아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꽤나 외로워진다.


누구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오히려 가깝기 때문에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들도. 그래서인지 가끔 나는 쌩판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서류 더미처럼 쌓인 내 생각들을 탈탈 쏟아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말이 안 통하니 번역기를 써야 하려나? 또 가끔은 영화 <트루먼 쇼>의 짐 캐리처럼, 내가 사람들에게 관람당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면 나의 지하실 속 마음들도 타의로 시청자들에게, 무려 전지적 주인공 시점으로 오픈되겠지.


The Truman Show, 1998



파고들수록 커지는 것들이 있다. 사랑도 그렇지만 후회나 외로움 따위도 그렇다. 때로 우리는 외로움에 잠식당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을 방어책으로 삼곤 한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 근질거리기 시작할 때면, 그 씨앗이 싹을 못 내밀게 꽁꽁 싸매어 두고 다른 일들을 한다. 사실 방어책이라기 보단 귀찮은 건지도 모른다. 정의를 내리기엔 너무 귀찮고 안 내리기에도 성가신 그 기분을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희한하게도 지하실에 처박아둔 나의 씨앗은 어떻게든 비집고 나와서 나도 모르게 나무가 되고 그늘을 드리우곤 했다. 그러면 이따금, 완전히 혼자인 새벽이 되면 나는 그 아래에 기어들어가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것이 나를 삼키는지 내가 그것을 찾아가는지는 자주 분간이 어려웠다. 그저 이름 모를 그늘에 한껏 빠져서 허우적대다 잠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천만 가지 감정이 있는데 외로움이라고 뭐 특별할 것 있을까. 그런데도 외로움은 참 극복해야 하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당연히 행복, 즐거움 같은 단어보다야 부정적인 쪽으로 저울이 기울겠지만. 그래도 나의 외로움을 나조차도 외면하려 하니까 자기가 꾸역꾸역 싹을 내어 ‘나 좀 봐줘’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외로움도 비관하지 않고 돌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의욕이 좀 있는 날이면 감정의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가 깊은 눈까지 도달한다. 외로움을 싹 틔우는 각종 이유와 해결책을 종이에 마구 적어서 논리적인 상태로 만들어버리기도 하고. 그러면 조금은 진정이 된다. 물론, 그런 논리마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다.


여전히 외로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이제 나는 그 추상적인 일렁임을 전처럼 지하실에 가두지 않고, 또 그렇다고 나를 덮치게 두지도 않으려고 한다. 그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당히 표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 나 뭔가 힘들었구나. 오늘도 외로움이 와줬구나. 그렇게 스스로 받아들여준다면 그 감정 속에서 서핑하듯이 부딪치고 유영하련다. 아직은 초보라 서툴지만.


오늘 글은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새벽 4시까지 서핑을 시도한 무모한 나의 일기장이다. 모쪼록 각자만의 행위로 외로움을 마주할 줄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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