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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연 Feb 19. 2022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져야 할까?

구십오점을 못 견디는 사람들에게

“더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무조건적인 위로가 필요하신 분들께는, 이 글을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아, 정말 이번 글 더럽게 안 써지네.


확실히 나는 스스로에게 느긋하고 너그러운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압박의 대표주자라고 해야 하나. 며칠 밤낮을 조급하게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면서 또 한 번 느낀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느긋함’을 선망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느긋함이란 이상적이며, 자위적이며, 비현실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아마 현실의 속도에 빠르게 따라붙던 스스로의 모습에 꽤 자만했었나 보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쫓기듯이 살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쫓김은 나 자신의 채찍질에서 비롯됐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보다 조금 더 노력해야 그다음 성취가 있다고 굳게 믿던 나이와 환경이었다. 집중하여 성과를 내는 데 능했던 나는, 눈앞의 일보 전진에 집중했다. 더 잘하고 싶었고 더 나아지고 싶었기에 하루하루 조금의 후퇴도 용납하지 않았다.




10여 년 새, 사람들이 원하는 삶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다. 자신만의 페이스. 내려놓기.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 기타 등등. 아마 경쟁과 성과에 치인 우리 세대가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바람들이지 싶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느끼기에는, 이전보다 삶에서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져버렸다.


좀 더 솔직하자면, 이런 새로운 가치들이 주목을 받으니 아주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아 나도 그때 좀 더 순간을 즐길걸. 나도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더 면밀히 기울여볼 걸. 앞만 보고 달렸는데 갑자기 옆도 뒤도 봤어야 한다니, 내 도약의 방식을 평가절하하게 되더라. 아니 정확히는 백점짜리에서 딱 구십오점 쯤으로 재채점하는 찝찝함이 생겼다.


어찌 됐든 도저히 구십오점짜리가 될 수 없는 성격이라, 나는 모자란 5점을 찾아 나섰다.




안타깝게도 내가 메우고자 했던 5점은 허상에 가까웠다. 그건 '여유' 같은 한 단어로는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뭐랄까 결과 외적으로 일상에서 얻어내고 싶은 한 줌의… 있어 보이는 가치 같은 것이었다. ‘더 나은 나’를 완성해줄.


부끄럽게도 그 5점에 집착하던 나는, 삶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고 내가 갖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캐내려고 했다. 예를 들어 욕심과 열정을 제치고 일상을 즐기는 데 집중해본다던가. 나를 옥죄고 있던 몇 가지 집착을 내려놓는다거나. 웃기게도 그러자 어느 순간 또 잔잔해지는 삶이 묘하게 불편했다. 문득 백점도 구십오점도 아닌 빵점짜리 열등생이 된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최적의 점수였던 내 삶에, 굳이 빈틈을 만들어내서 무언가를 욱여넣으려고 하고 있었나 보다.


깨닫고 나서야 차라리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나답게 살아야지. 5점은 그저, 보너스 점수 같은 거였는데.




이 모든 게 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나아지고 싶은, 자신을 채울 5점을 찾고 있는 동지들이 있을 테니.


나는 우리가 어제보다 더 나아질 필요 없다는 비현실적인 말은 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사회 다수 인원이 부르짖는 각종 가치의 늪에서, 자신만의 백점의 정의를 세우지 못하면 방향성을 잃고 스스로를 속일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거다. 내 것이 아닌 5점을 욕심내던 나처럼.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모든 면에서 나아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가치들을 쫓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문해보면서, 각자만의 백점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적어도 나에게 맞는 길을 가고 있다고 위로를 건넬  있는.



*커버 사진은 22년 2월, 종로 수제비에서 맛있었던 지평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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