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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Dec 05. 2019

구년친구를 만나러 가며

고맙고 반가운





구년친구. 오래 헤어진 친구 또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를 뜻하는 말. 상반되는 정의가 들어 있는 이상한 단어지만 내게 이 단어에 잘 어울리는 몇 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오래 헤어져 있지만 오래 사귀고 있는 사이.


한 해가 끝이 날 무렵이면 한동안 연락하지 않던 구년친구들에게 연락이 오곤 한다. 오랜만에 연락이 오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언제 봤던가 떠올려 보게 된다. 그때의 날씨, 만났던 장소, 먹었던 음식,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면 대충 언제쯤이었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 나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나 되짚어 본다. 

     


만나자는 연락을 내가 먼저 잘 못하는 편이라 늘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에는 좀 좋은 소식을 가지고 꼭 내가 먼저 연락해야지 다짐한다. 하지만 역시 나는 이번에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만 친구가 연락하기를 바라지 않고 언제든 연락이 오면 반갑기만 하면서 정작 내가 먼저 연락을 하려 할 때는 꼭 용건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이토록 소심하고 삭막한 망설임이라니.     


그래서인지 한 동안은 오래간만에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대뜸 결혼하느냐고 묻곤 했다. 내가 이런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용건이 있어 연락을 한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같이 메마른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난 후로는 마음가짐이 조금 바뀌었다. 별다른 용건이 없어도 단지 우리가 오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만나자고 하는 친구의 연락을 받으면 예전보다 훨씬 더 반갑고 고맙다.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이 만나야 할 의무도 없는데 나를 생각해서 연락을 했을 그 마음이 크게 느껴진다. 다 처지가 비슷한 학생 시절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쉽게 만나던 것과 달리 이제 생활 반경이나 패턴이 꽤 달라져 시간이나 장소를 정하는 것부터 꽤 애를 먹지만 그래도 갖은 수를 써서라도 친구와 약속을 맞춰본다.     



언젠가 이동진 님의 라디오를 들을 때가 떠오른다. 사연은 기억나지 않고 그에 대한 답으로  DJ가 한 말이었다. 그에게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이제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 만나면 각자의 생활에 대해 적당히 이야기하고 옛날 일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데도 지금까지 꼭 잊지 않고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고 했다. 이런 관계도 필요한 것 같다고 나쁘지 않다고 했다.      


어쩌면 별 내용 아닌 그 말이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즈음 내가 자주 했던 생각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럴 때가 있지만 그때는 그 감정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진짜 내 고민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각자의 현재에 대해 말하고 옛날 일을 추억하고 그런 것들이 왠지 모르게 형식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만남을 계속 이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내 상황은 친구들에 비해 좋지 못한 것 같았고 매일 똑같아 새롭게 이야기할 거리도 없어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 실려 몸을 앞뒤로 흔들리면서 했던 말, 들었던 말 곱씹으면서 괜히 못난이가 되었다.     


 

그랬던 나에게 그런 생활도 그런 관계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꼭 대답해 준 것 같았다. 나의 찌질한 과거를 직접 목격했고 삽질도 같이 했던 사람과 일 년에 많아야 두어 번 그때의 추억을 곱씹는 것도 인생에서 꽤 소소한 즐거움이고 또 우리가 서로 계속 좋은 관계로 잘 지내야만 가능한 일인데 쉽게 주어진 것처럼 생각했던 날들이었다.      


그런 생각의 방황을 거쳐 이제는 그때보다 훨씬 반가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지만 여전히 나는 먼저 연락을 선뜻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못난 내게 마음을 써주는 고마운 친구들 덕에 우리는 만난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헷갈리고 한 얘기를 또 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즐겁다. 맛있는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준비해온 선물도 주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또 어쩌면 이번에도 지키지 못할지 모르는 다짐을 할 것이다. 내년에는 꼭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만나야지. 그리고 다음에 볼 때까지 우리의 대화들과 장면들을 문득문득 떠올리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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