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이 Dec 09. 2019

같은 도시를 두번 여행하는 일

비오는 제주에서





제주에 다녀왔다. 출발 며칠 전 마지막으로 찾아본 예보는 맑음이었는데 도착해보니 이슬비가 오고 있었다. 그제야 일기예보를 검색해보니 오후에 비가 그치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비슷한 가격의 커피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잘도 사 마시면서 우산 사는 건 아까워서 일단 남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1시간 정도 가야 하니 혹여나 그 사이에 비가 그치지 않을까 기대했다. 버스 안에 습기가 가득해 창문에 김이 서렸고 바다도 산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 제주에 왔을 때 도착하자마자 찾았던 식당이 문을 닫아 허탈했던 기억에 비까지 맞을 걱정을 더해서 버스 안에서 찾아가려는 가게가 영업 중인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했다. 밖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전화기까지 붙들고 있으니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가게가 버스정류장 바로 앞이었고 영업도 하고 있었다. 일단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으면서 비가 오나 안 오나 창밖을 관찰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으니 안에서는 뚫어져라 봐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저녁에 비가 그친다고 다시 변경되어 있었다. 진작 우산을 살 걸 후회하면서 카메라를 외투 안에 넣어 안고 비를 맞으면서 걸었다. 우산을 살 수 있는 편의점은 20분 정도 걸어가야 있었다. 사람이 걷는 길이 따로 없어 도로가를 걸었다. 차들은 쌩쌩 지나갔다. 도로가에 심어져 있는 담팔수나무 덕에 비를 조금 덜 맞을 수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는 소리를 밖으로 내어 노래를 조금 불러 봤다. 쌩쌩 지나가는 차에게 좋겠다!라고 말도 해봤다. 그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짜증이 나거나 처량하지는 않았다. 묘하게 씩씩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제주에 언제든 올 수 있을 거라는 예감 또는 믿음 덕분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 다짐을 잘 믿지 못하게 됐다. 다짐해도 금방 포기했고 상황에 핑계를 대며 하지 않은 일들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지난번 제주에 와서 시간과 공간에서 제약이 있어하고 싶은 것을 일정상 못하게 되었을 때 다음에 또 오면 되지. 그렇게 먼 곳도 아닌데. 다짐했지만 왠지 계속 초조했고 좀 짜증이 났다. 그때의 나는 그 다짐을 잘 믿지 못했나 보다. 무리해서 여행 계획을 짜지는 않았지만 마음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답답함이 있었다. 이번에는 여행 코스를 짤 때부터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거리상 무리인 곳을 하나씩 제외하고 마음에 들지만 갈 수 없는 숙소 대신 다른 곳을 예약하면서도 다음에 또 올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 안도감은 여행지에 와서도 이어져 비가 오고 일기예보가 맞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고 나름대로 그 상황을 즐길 수 있게 해 줬다.   

    


꽤 오래전 어느 여행지에서 A4 사이즈의 세계전도를 샀다. 집 벽에다 붙여두고 다녀온 나라들에 색칠을 해두었다. 그 지도를 보면서 언젠가 온 나라에 표시를 다 해보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한번 다녀온 곳은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같은 비용과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른 새로운 도시를 여행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즈음에는 나는 내 다짐을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만지면 프라하에 다시 오게 해 준다는 카를교의 동상 앞에서 손을 올리고 사진은 찍으면서도 정작 그 다짐은 여전했다. 그러는 동안 몇 번의 이사에 지도는 헤지고 찢어져 다이어리 틈 사이에 끼워 넣어 버렸다. 내 다짐도 헤지고 찢어져 잊혔다. 그리고 나는 같은 도시를 두 번 여행하게 되었다. 그건 같은 비용과 시간의 낭비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꽤 괜찮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비 오는 제주의 바다를 보는 것 또한 괜찮은 일이었다. 비 오는 바다에는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밀려나고 다가오고 또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다짐들도 내 속에서 밀려났다 다가오기를 반복했다. 그 날 일기예보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 구년친구를 만나러 가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