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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Dec 31. 2019

넓고 깊은 물 같은

세밑 바람을 맞으며 






연말의 화려함과 따뜻함, 내년에 대한 설렘이 사라져 버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언젠가부터 연말이 되면 왠지 모르게 한 것도 없이 시간만 지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느껴졌다. 내가 한 해 동안 했던 것들, 고생했던 것들, 과거에 비해 나아진 것들을 떠올리며 그 감정들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몇 해 정도는 그런대로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에도 역시 나에게 수고했다고 일기를 써보려 했지만 이상하게 점점 더 허무하고 의미 없어지는 것만 같아 몇 줄 쓰지 못했다. 이룬 것들, 경험한 것들을 쓰려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성취와 경험이 뒤엉켜 따라붙었고 내 것은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다가올 좋은 일을 기대하려 해도 마음가짐이 형편없으니 다 엉망이고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 일기를 쓰려한 것뿐인데 몸싸움이라도 한 양 지쳐버렸다.     


그래서 올해는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는지 되짚어 보지 않으려 했고 애써 나를 위로하려 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게 마음이 더 편했다. 달력 하나 바꾸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다 며칠 전 버스를 1시간 정도 탈 일이 있었는데 이어폰 배터리가 없었다. 이어폰이 없으니 딱히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서울 중심을 가로지르는 버스는 연말 분위기 가득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한 해 있었던 사건들을 되짚어 보게 됐다. 그랬더니 반성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세상의 더 큰 부조리는 외면하고 내 앞의 조그만 불편에 불쾌해했던

주어진 것은 쉽게 생각하고 내게 없는 것, 못 가진 것을 쉽게 부러워했던

노력한 과정은 보려 하지 않고 얻은 결과를 쉽게 질투했던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아 보려 하지 않고 쉽게 마음을 닫아 버렸던

노력 없이 요행만을 바라고 기다리지 못하고 쉽게 좌절하고 상처 받던

손끝의 조그마한 거스러미를 보느라 옆에 있는 이의 큰 상처는 보지도 못했던

내 허물은 금방 잊어버리고 남의 잘못은 오래 기억했던

시작도 해보기 전에 온갖 부정적인 미래를 다 끌고 왔던

오래 과거에 머물고 쉽게 미래로 떠나버리던

가까운 이의 절망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순간의 나를  반성했다.     


이상하게도 도리어 반성이 위로가 되고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정신 차리게 해 주었다. 내 마음에 드는 나보다 떠올리기만 해도 귓불이 뜨거워지는 창피한 내가 많았던, 쉽게 울고 쉽게 웃었던 얕은 물 같은 해였지만 따뜻하고 씩씩하며 못난 내게 마음 써주는 고마운 이들 덕에 옹졸한 마음으로도 별 일 없이 잘 넘긴 한 해였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에 돌아가는 길 내 속에 쌓여 있던 묵은 미움과 옹졸함, 받을 상대도 없는 원망들을 세밑 바람에 꺼내 다 날려 버렸다. 초라함과 부정을 날려 보낸 그 자리에 다가오는 해에는 아까워하지 않고 마음을 퍼내 주며 열 받아 끓게 하려는 것들에도 쉽게 온도가 오르지 않고, 거칠고 모진 바람에도 속은 잔잔한, 넓고 깊고 큰 물로 가득 채우기를 바라본다. 좌절에도 쉽게 메마르지 않고 뒤를 보며 멈칫하지 않고 고이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꾸준히 잘 흘러가는 넓고 큰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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